박수근 집터 앞에 세워진 표식 ‘기억'.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한국전쟁이 끝나자 화가 박수근은 흩어졌던 가족들을 모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작은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11년 동안 이곳에서 그는 ‘길가에서(1954)’, ‘절구질하는 여인(1954)’, ‘나무와 두 여인(1962)’, ‘유동(1963)’ 등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박수근이 살았던 창신동 393-16번지 집은 지금은 가게들로 바뀌고 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박수근 집터 앞에 유비호, 이수진 작가가 박수근 가족의 사진을 담아 만든 기념비가 섰다. 그보다 앞서 지난 3월10일엔 창신동 197-33번지에 백남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미디어 아트작가 백남준이 5살부터 18살(1937~1950년)까지 13년 동안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요즘 창신동 거리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과 백남준의 흔적들로 다시 꾸며지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박수근과 백남준을 기억하는 창신동 길’ 조성 사업이다.
서울 동묘앞역에서 내리면 박수근 집터로 가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이번 프로젝트는 계단 손잡이나 비상구 표지판 환풍구 등 원래 있던 설치물을 활용해 자연스레 미술가의 흔적을 찾아가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박수근길은 동묘앞역 6번출구에서 박수근 집터-박수근 광장 등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광장 환풍구 외벽에는 박수근 작가가 바라보았을 1950, 60년대의 창신동 마을의 풍경을 담은 이문호, 이배경의 작품 ‘마을’이 설치됐다.
박수근과 백남준을 기억하는 창신동 길 전체 지도.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백남준 길은 서울 동대문역 3번 출구에서 백남준 광장을 지나 백남준 기념관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엔 ‘달과 토끼’(유비호, 이수진),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이문호, 이배경) 등 백남준 작가 미디어 아트를 연상케하는 작품들이나 그의 메시지를 담은 설치미술들이 있다. 어느 쪽이나 원래 거리 풍경을 크게 바꾸지 않는 소소하고 작게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기존 형태를 유지하면서 주변 환경과 시민 편의를 개선하도록 도시 구성 요소를 활용한 ‘비우기식 공공미술’을 적용한 것이다. 서울디자인재단 공공미술팀은 “단순히 박수근과 백남준에 대한 기념비적인 표식과 장소를 만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수근에서 백남준을 잇고, 다시 백남준에서 박수근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따라 한국 근현대 미술문화의 두 거장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만날 수 있는 길을 조성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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