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강릉에서 발생한 산불로 집을 잃은 함순자 할머니가 임시주거 시설인 마을 경로당에서 대피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민등록증도 다 잿더미가 됐어. 내일 투표해야 하는데…”
8일 오후 강원 강릉시 홍제동의 상선연경로당에서 만난 함순자(84)씨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통령 투표를 못하게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산불로 집이 불에 탄 함씨는 “몸뚱이만 겨우 빠져나왔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주민등록증 챙길 겨를이 어디 있었겠어. 매번 투표날은 빼먹지 않았는데, 산불이 집을 뺏어가더니 투표까지 못하게 하네”라고 언성을 높였다.
하늘에서 산불진화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자 함씨는 “‘두두두두’ 저놈의 헬기 소리만 들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려”라고 진저리를 쳤다. 산불은 함씨의 건강까지 해치고 있다. 함씨는 “나이가 있다보니 여기저기가 아픈 곳이 많아 매일같이 아침 5알, 저녁 3알씩 약을 먹는데 약도 못 챙겨왔다”고 말했다.
함씨는 산불이 난 지난 6일 이후 강릉시에서 지정한 경로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바닥엔 한기를 막아줄 캠핑 매트리스들이 깔려 있고 벽 한쪽엔 물, 쌀, 라면, 즉석밥 등 구호 물품이 어지럽게 쌓여있다. 82㎡ 남짓한 경로당에는 함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재민 10명(5세대)이 함께 지내고 있다.
이날로 3일째 강원 산불이 꺼지지 않는 가운데 다른 이재민들 상황도 함씨와 비슷하다. 산불로 집을 잃은 강릉시 성산면·홍제동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관음1리와 관음2리, 위촌1리, 공제 등 마을 경로당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경로당은 숙식을 해결하는 용도로 만든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주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함씨와 같은 경로당에 지내는 어재옥(84)씨는 “살아 나온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3일째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머리를 감을 곳도 없고 빨래를 해도 널 방법도 없다”고 불편을 토로했다.
산불 이재민들의 또다른 임시주거시설인 공제경로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임정섭(52)씨는 “오후에 시청에서 ‘밥은 잘 먹었냐’고 전화가 왔길래 ‘아침은 김치 반찬 하나에 컵라면에 즉석밥, 점심도 마찬가진데 잘 먹었냐고 물으면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집도 없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공제경로당에 지원된 구호물품은 참치캔과 즉석밥, 김치, 김, 물, 고추장, 식용유, 이불, 코펠 등이 전부다. 임씨의 아내는 “햄을 구워먹으려고 해도 경로당 조리기구가 오래되고 더러워 라면으로 끼니만 해결하고 있다. 산불 피해를 겪은 뒤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운 증세를 느끼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시청 등 행정당국의 무관심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남행수(88)씨는 “이재민들은 언제까지 경로당에서 살아야 하고 보상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궁금해하고 있다. 산불이 나자 정치인들이며 높은 분들이 많이 다녀갔지만 정작 우리가 궁금한 내용에는 상세한 답변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강릉/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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