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로로 바뀐 의정부시 금오동의 한 주택. 도로명 주소판을 새로 붙였지만, 우편함에는 여전히 옛 주소가 붙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배다리)동은 1872년 조선 시대 지도에도 나오는 지명이다. 이름처럼 배다리가 놓였던 동네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한강 중상류에서 떠내려온 배들을 이용해서 배다리를 놓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주교동 옆 마을 원당(元堂·으뜸 집)동은 고려 공양왕릉과 서삼릉 등 왕릉의 재실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또 벽제동은 조선시대 영조가 사도세자의 혼을 달래기 위해 이 곳을 지나던 중 주위의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다고 ‘벽제(碧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지역의 유서깊은 마을들이 2014년 ‘도로명 주소 전면 사용’ 정책에 따라 모두 ‘호국로’라는 뜬금없는 도로명 주소로 불린다. ‘나라를 지킨 길’이란 뜻을 가진 호국로(護國路)는 고양 행주대교에서 시작해 양주, 의정부, 포천을 거쳐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까지 2개 도, 5개 시·군을 거쳐 무려 111.8㎞에 걸쳐 있다. 호국로는 이 곳 말고도 경북 칠곡과 경북 영천~경주, 전북 임실 등에도 도로명 주소로 사용된다.
도로명 주소는 지역의 전통 지명을 파괴하고, 위치 파악이 어려우며, 부동산 거래 때문에 기존 주소와 함께 써야 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다. 참다 못한 경기도 의회가 최근 ‘도로명 주소 제도 개선 촉구 건의안’을 발의했다. 경기도 의회는 건의안에서 “도로명 주소를 시행한 지 3년이 지났지만 국민은 도로명 주소 제도를 불편해하고 사용률은 여전히 저조한 상태”라며 “도로명 주소가 불편한 이유는 너무 광범위한 거리에 걸쳐 있어 공간적인 위치 인식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기존의 동명·지명이 삭제되면서 해당 지역의 정체성이 사라졌고, 지역의 역사성을 없앴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의회는 대안으로 현행 도로명 주소에 동·리의 지명을 함께 사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구까지만 표시하는 도로명 주소에 전통 지명인 동·리의 지명을 넣고 그 뒤에 도로명주소를 표기하자는 것이다. 개선안을 적용하면, 예컨대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는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호국로’로 바뀐다. 이러면 도로명 주소 사용에 따른 혼선을 막고, 역사성을 지닌 고유 지명을 살릴 수 있으며, 구체적인 지역 위치도 알 수 있다는 것이 경기도 의회의 주장이다.
건의안을 대표 발의한 이재준 경기도 의원(더불어민주당·고양2)은 16일 “도로명 주소는 공간을 면(마을, 동네)으로 인식하는 우리나라와 선(도로)으로 인식하는 서양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 매우 불편하다. 일제도 말살하지 못한 전통 지명을 우리 스스로 훼손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예산만 낭비한 불편한 정책이므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회는 다음달 본회의를 거쳐 새 정부의 개혁 과제 중 하나로 도로명 주소 제도 개선안을 국회와 정부에 전달할 예정이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