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경기 부천시약사회관에서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 1회 수상자인 희망재단 아동학대피해예방기금에 200만원의 기금이 전달됐다.
“우리 모두가 그녀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녀의 뜻을 기리려 합니다”
도시 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삶을 살다 1992년 숨진 고미애(당시 28살) 약사가 6월항쟁 30돌을 앞두고 ‘고미애 약사상’으로 부활했다.
경기 부천시약사회는 지난 3일 부천시약사회 50년사 출판기념회에서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을 시상했다. 첫 수상자는 희망재단 아동학대피해예방기금이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지부’가 200만원을 전달했다.
고씨는 1992년 2월5일 저녁 8시15분께 당번 약국을 지키던 중 미등록인 필리핀 노동자의 폭력에 의해 의식 불명이 됐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부천 성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1주일 만에 숨졌다.
가수 문주란의 <주란꽃>을 즐겨 불렀다는 평범한 약대 여대생이 도시빈민운동에 나선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부산 출신으로 1984년 숙명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7년 5월 약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음대 학생회장이던 친구 최도은(53)씨는 “학교 분위기상 총학생회 건설이 어려웠다. 1986년에 전체 과 학생회장들이 모여서 단과대 회장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때 약대와 미대는 아예 운동권 학생이라고는 없었다. 처음으로 미애를 보았는데 미애는 운동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1987년 숙대 약대 학생회장으로 6월항쟁에 참여하고 이후 부천에서 도시빈민운동을 하다 1992년 숨진 고미애 약사 모습.
1987년 고씨가 단대 학생회장이 된 직후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숨졌다. 그해 1월 박종철 서울대생 고문치사 사건과 4·13호헌조치로 전두환의 군부독재 연장의도가 노골화되면서 민심이 들끓는 가운데 숙대 역시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서울역 6·10시위를 준비 중이었다. 최씨는 “미애와 함께 연대 도서관에서 살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6월10일 전체 숙대생 6천명 중 4천명이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다. 숙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미애는 ‘비권(비운동권)’이었지만 성품이 그랬다. 당시 84학번들이 다 그랬다. 싸움 나면 나가고, 모임이 있으면 다 가곤 했다”고 말했다.
6월 항쟁은 ‘그저 꿈 많은 소녀’였던 한 평범한 약대생의 미래를 바꿨다. 고씨의 지인들은 “1987년 그해, 성품이 좋았던 고씨가 군부독재에 대한 분노와 투쟁을 거치면서 자발적 활동가로 성장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고씨는 1988년 대학을 졸업하고 민주약사동우회를 거쳐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에 도시빈민분과에서 활동하다 1989년 부천시에 약국을 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2인 약사가 있는 공영약국이었다. 건약에서 함께 활동했던 원남숙(53) 약사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각계각층의 분야에서 대중운동이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약학을 전공한 우리도 고민이 컸다. 그때 미애는 건약의 도시빈민분과에서 활동했는데 그 활동을 잇기 위해 부천을 선택해 약국을 열었다”고 말했다.
약국을 낸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은 인근 약대동과 함께 도시 빈민은 물론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 고씨의 생활을 지켜본 이들은 고씨가 이곳에서 낮에는 약국 일을, 밤에는 부천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연합의 상담실장으로 일했다고 전했다. 매주 1차례씩은 도시 빈민 자녀를 위한 새롬공부방 자원교사로도 나섰다.
이곳에서 활동은 불과 3년, 고씨는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고씨의 대학 약대 후배인 부천시 약사회 윤선희(50) 부회장은 “미애 언니의 소식을 듣고 부천 장례식장에 와보니 테이블마다 난리가 났더라. 옆에서 ‘우리 단체 활동가였는데…’하면 다른 테이블에서 ‘우리 단체에서도 일했는데…’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시간을 쪼개 지역활동을 하고 자신이 받는 월급 중 20만원을 빼고는 다 사회에 환원했던 고씨였지만 평소에는 이런 내색을 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고씨를 떠나 보낸 상심은 더욱 컸다.
윤씨는 “당시 미애 언니가 1주일 병원에서 의식 불명인 상태에서 약사들이 쑥가지를 태우고 번갈아가며 인공호흡을 하면서 언니를 살리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한방 치료를 싫어하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그때 만큼은 아무 말도 않더라”고 했다. 당시 부천지역의 한 언론은 “부천이 ‘약왕 보살’을 잃었다”고 고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경기 부천에서 도시빈민운동을 하다 숨진 고미애(당시 28살) 약사의 노제가 1992년 2월14일 생전 운영하던 부천시 여월동 아람약국 앞에서 열렸다.
고씨를 곁에서 지켜봤던 당시 부천주거연합 의장 지성수 목사(현 오스트레일리아 거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간애가 가득한 그를 보고 나는 ‘까칠한 성녀’라고 했다. 그가 비명에 갔을 때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있을까’에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아픔은 모두를 덮쳤다. 고씨를 숨지게 한 상대가 바로 고씨가 도우려던 미등록인 외국인 노동자라는 사실 때문에 주변 지인들의 트라우마는 더 심했다. 함께 활동하던 동료는 아예 현장을 떠났고, 대부분 10여년 이상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 건약 부천 분회장이었던 이규화(53) 약사는 “나는 미애처럼 그렇게 못한다.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나. 어쩌면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 하러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너무 억울하다. 미애가 돕고 싶어했던 약자들, 외국인 노동자한테 죽임을 당했잖아요. 약국은 없어졌지만 건물은 그대로다. 난 아직도 그 동네에 못 들어간다”며 눈물지었다.
고 약사의 죽음 이후 많은 이들이 아파했지만 새로운 희망도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재한 상태 속에서 고씨의 죽음은 부천에서는 처음으로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을 여는 씨앗이 되었다. 오랜 시간 상처에 아파했던 이들도 서서히 다시 고씨의 삶을 조금씩 이어가고 있다.
10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고미애 약사상 논의를 위해 지인들이 모였다. 오른쪽부터 지성수 목사, 윤선희 약사, 민중 가수 최도은씨, 원남숙 약사, 이규화 약사다.
대학 후배인 윤선희씨는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92년 겨울, 고씨가 좋아하던 노래 <너를 부르마>를 부르며 친구 고씨를 떠나 보낸 최씨는 민중 가수로 활동하면서 지난겨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무대에서 촛불 시민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한 노래를 다시 불렀다.
올해 들어서는 윤선희 약사를 중심으로 ‘이웃사랑 고미애 약사상’이 만들어졌다. 전국의 20여명의 약사가 ‘함께 하고 싶다’며 십시일반 기금을 냈고 이들은 매년 고씨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이들을 돕는 단체를 선정해 기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6월 항쟁 30년, 그리고 고씨가 숨지고 25년 만인 올해 6월, 고미애 약사는 다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아났다.
친구인 최도은씨는 “미애는 87년 그 시절 자신이 보고 겪었던 것을 사람들하고 소통하고 실천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미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무엇이라도 우리보다 못 가진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는 그런 이야기를 늘 하곤 했다”고 말했다. 부천/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