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유가족 이경자(74·왼쪽)씨가 8일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법 청사를 나서며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손을 잡으며 기뻐하고 있다. 이 소송 1심 재판부는 이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2017.8.8 연합뉴스
“73년이 지난 오늘에야 시할머니 원을 풀었습니다.”
8일 오전 10시20분께 광주지법 앞에서 이경자(74)씨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징용 손해배상사건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난 뒤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일제강점기에 근로정신대로 갔다가 목숨을 잃은 고 최정례(당시 14살) 할머니의 조카며느리이다. 최씨는 1944년 5월께 “돈도 벌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일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하다가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 사망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영화 <군함도>의 배경인 미쓰비시광업 하시마탄광과 같은 미쓰비시의 계열 기업이다.
이날 광주지법 민사1단독 김현정 판사는 고 최정례씨의 조카며느리 이씨와 강제징용 피해자 김영옥(85)씨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김 판사는 미쓰비시중공업은 생존자인 김씨에겐 1억2천만원, 사망한 최씨의 유족에게는 상속지분에 근거해 325만6천여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김 판사는 “미쓰비시중공업이 급여도 지급하지 않고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지진 때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아 최씨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김씨가 심한 화상을 입게 한 것은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씨의 시할머니(숨진 최정례씨의 어머니)는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딸이 원통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이불을 덮고 자겠느냐’는 애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시할머니는 이씨에게 “명절 때 (죽은 딸을 위해) 밥이나 한 그릇 담아놓아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씨는 57년째 명절 때마다 시고모의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 판결이 나고 있지만, 피해자들은 애를 태우고 있다. 대법원은 2012년 5월24일 2건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 재판에서 개인청구권을 인정해 사건을 항소심 법원으로 되돌려 보낸 뒤, 피해자들이 2013년 7월 재상고했지만 아직까지 확정 판결을 선고하지 않고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인 이상갑(49) 변호사는 “손해배상 소송건은 모두 16건인데 3건이 현재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다. 피해자들이 90살에 가까운 고령이다. 대법원이 하루빨리 확정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8일 아침 광주지법 앞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계자들과 유족 이경자(74·왼쪽 셋째)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이날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1945년 8월 원자폭탄에 피폭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조선인 징용자 명단을 폐기 처분한 사실이 확인됐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이 2차대전 중 한반도에서 강제징용된 3400명에 대한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를 지난 1970년에 폐기처분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마이니치신문>이 8일 보도했다.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에 올라있는 조선인 3400명은 1945년 8월9일 미군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당시 피폭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에게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해 의료비와 간병비 등을 주고 있는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해서는 피폭을 당했다는 근거가 필요하다. 나가사키 지역의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는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경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한 결정적인 증거 자료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이 자료를 없앤 사실이 그나마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징용자 원폭피해자들의 투쟁과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 덕분이었다. 일본시민단체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는 한국인 징용자 3명의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부받기 위해서, 지난 5월부터 미지급 임금 공탁명부 공개를 나가사키지방법무국에 요구했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은 지난달 공문으로 공탁 명부가 1970년 3월 보존 기간이 만료되어 폐기되었다고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에 회신했다. 이는 일본 정부 방침에도 어긋나는 조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법무성은 1958년 전후 처리 미해결을 이유로 △한반도 출신 징용자의 미지급 임금은 공탁 뒤 채권 소멸 시효인 10년이 지나도 국고에 넣지 말 것 △이미 국고에 넣었을 경우 관련 서류를 보존하라고 통지한 바 있다. 피폭자 지원단체는 “피폭자가 지원받을 권리를 국가가 빼앗은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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