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박종관씨가 지난 3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자신의 수박밭에서 기형으로 자란 수박을 들어 보이며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수박 농사만 28년을 했슈.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인디…. 답답해 죽겄구만유.”
수박밭에 들어서자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난 3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박종관(62)씨의 수박밭엔 채 자라지 못한 수박이 즐비했다. 조롱박 모양으로 찌그러지거나 옆구리가 터져버렸다.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비닐하우스 11동에 나눠 심어 키운 수박 5500주 대부분이 이 모양이었다.
찌그러진 수박을 바라보며 박씨는 “처음 수박 열매가 맺힐 때부터 조롱박 모양이길래 이상하다 했다. 씨앗을 판 종묘회사에 물었더니 더 자라면 찌그러진 모양이 펴지면서 정상이 된다며 안심시켰다. 그런데 다 자란 뒤에도 계속 조롱박 모양이거나 수박 옆구리가 터져버리더라. 잘라 먹어보면 당도도 없다. 죄다 팔 수 없어 내일 밭을 그대로 갈아엎을 참이다. 수십년 수박 농사 짓는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자라면서 옆구리가 스스로 터져 갈라져 버린 수박.
규암면의 다른 농가도 박씨와 마찬가지 상황이다. 대부분 20년 가까이 수박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 이기작(그해 같은 밭에서 2번째 재배) 농사는 모두 망쳤다. 26개 농가의 비닐하우스 164동에서 심은 수박 8만주 대부분 조롱박 모양이나 열과(수박이 자라면서 스스로 터져버림) 등 기형과로 자랐다. 490여t의 수박을 출하하지 못해 약 12억원의 손해를 봤다.
농민들은 수박 ‘씨앗’을 의심한다. 같은 씨앗으로 키운 수박밭에서만 똑같은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피해를 본 26개 농가의 농민들은 부여 규암농협 수박 공선회에 속한 조합원이다. 이들은 매해 농협을 통해 단체로 수박 씨앗을 사서 키운 뒤 다시 농협을 거쳐 수박을 출하한다. 규암농협은 농민들을 대신해 씨앗 선정과 판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올해 처음으로 ㅅ종묘의 기능성 수박인 ‘ㅎ’ 씨앗을 샀다. “롯데마트에서 선호하는 품종”이라는 농협중앙회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규암농협은 수년째 롯데마트에 수박을 납품하던 터였다. ‘ㅎ’수박은 롯데마트가 2008년부터 판매하는 기능성 수박이다. 겉면이 까만 수박의 일종으로, ‘ㅎ’이라는 명칭은 ㅅ종묘가 상표등록한 것이다.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해 인기를 끌어 롯데마트에서 파는 수박 가운데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2008년 ㅅ종묘와 농협이 협업으로 ‘ㅎ’수박 재배에 성공했다고 알고 있다. 그때부터 자체 브랜드로 이 수박을 판매한다”고 말했다.
규암농협 유통센터 관계자는 “농협중앙회 대외마케팅팀의 롯데마트 담당 직원이 ‘ㅎ’ 씨앗을 소개했다. 보통 다른 때는 지역농협이 직접 여러 종묘회사의 씨앗을 비교해보고 알아서 종자를 선정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ㅅ종묘 직원이 농협 대외마케팅팀한테 이야기를 들었다며 먼저 연락을 해와 그대로 씨앗을 택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ㅅ종묘의 홍보책자를 보면 ‘조생ㅎ’이라고 크게 쓰여 있고 이 종자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하다. 조생이란 단어가 붙지 않은 ‘ㅎ’ 씨앗에 대한 소개는 맨 뒷장에 비교적 작게 나와 있다. 농민들은 설명회 때 ㅅ종묘가 이 책자를 보여주면서 ‘조생ㅎ’과 그냥 ‘ㅎ’ 씨앗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농민 정진만(55)씨는 “우리는 비슷한 두 종류의 종자가 있을 줄 생각도 못 했다. ㅅ종묘는 수정이 잘되고 당도가 높으며 기형과 발생이 낮다며 주로 장점을 늘어놓았다. 우리와 같은 시기 농협을 통해 ㅅ종묘의 씨앗을 구입한 다른 지역의 농가들은 대부분 ‘ㅎ’이 아닌 ‘조생ㅎ’ 씨앗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같은 시기 ㅅ종묘의 씨앗을 받아 수박을 재배한 전국의 10개 지역 중 8곳은 ‘조생ㅎ’을 재배했고, 부여 규암과 경북 봉화만 ‘ㅎ’ 씨앗을 받아 키웠다. 규암과 달리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 키운 봉화의 ‘ㅎ’수박은 별 탈 없이 자라 정상 출하했다. 규암 주민 임효묵(52)씨는 “피해를 본 뒤 알아보니 ㅅ종묘의 ‘ㅎ’ 종자는 노지에서만 재배에 성공했더라. 우리 지역은 전부 하우스 재배만 하는 것을 알면서도 부적합한 씨앗을 판 셈”이라고 주장했다.
ㅅ종묘는 농민들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태도다. ㅅ종묘 관계자는 “농협중앙회 대외마케팅팀에서 연락처를 받아 규암농협에 연락했다. 사전 교육 때 농민들에게 ‘조생ㅎ’과 ‘ㅎ’ 씨앗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했다. ‘조생ㅎ’이 나온 것은 2~3년 전에 불과하고 그 전에는 하우스에서도 이번에 규암에 공급한 ‘ㅎ’ 씨앗으로 별문제 없이 재배했다. 기형과는 생리 장애(생물이 생명을 유지해가는 데 있어서의 여러가지 현상이나 기능에 이상이 발생하는 것)일 뿐 종자가 문제일 가능성은 없다”고 반박했다.
피해 농가 상황을 조사한 김용일 부여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는 “이런 경우 종자의 문제인지 밭의 문제인지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동일한 품종을 심은 전체 농가에서 다 기형과가 나왔다는 것은 종자 문제로 의심할 여지도 있다.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농촌진흥청과 국립종자원에 이 문제를 의뢰해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ㅅ종묘가 씨앗값뿐 아니라 출하하지 못한 수박값까지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ㅅ종묘는 올해 씨앗값을 받지 않고 앞으로 2년치 수박 씨앗을 지원하는 것 이상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농민과 종묘회사 사이의 갈등이 커지자 규암농협은 농협중앙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상 롯데마트와 농협중앙회가 종자 선정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종묘회사와의 협의에서 중재해달라는 요구였지만 거절당했다.
농협중앙회는 “농가들이 어떻게 ㅅ종묘를 알아서 씨앗을 선정하게 됐는지 우리는 모른다”며 ㅅ종묘에 규암농협을 알려준 일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김태완 농협중앙회 대외마케팅팀 팀장은 “문제가 있다면 규암농협과 종묘회사가 풀어야 한다. 농협중앙회가 롯데마트에 압력을 행사해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농산물 판매를 해야 하는 농협은 롯데마트와의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다. (롯데마트를 압박하는 것은) 전국 농협이나 농민 입장에서도 득이 될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수박 농민들이 애써 키운 수박은 썩었는데, 원인을 모르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농민 가슴도 썩고 있다.
부여/글·사진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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