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관에서 ‘박정희 대통령 3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남유진 구미시장(가운데)이 추모제례를 올리고 있다. 구미시 제공
26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38주기 추도식’은 좀 쓸쓸했습니다. 과거 박 전 대통령의 추도식이나 탄신제에 자주 왔던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구·경북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도 모두 불참했습니다. “좌파들과의 이념전쟁 최전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남유진 구미시장만 눈에 띄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추도식 방명록에 ‘박근혜 대통령님 조속히 석방하셔서…’라고 적었습니다. 왠지 처량해 보였습니다. ‘다들 바쁜 일정이 있겠지.’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추도식 안내 책자를 보고 좀 놀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님께서도 지금 현재의 정치적 유리, 불리를 따지지 않고 미래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드는데 혼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님의 유훈을 승계하는 바탕 위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담보되기 때문입니다’. 한국당 백승주 의원(구미시갑) 추도사였습니다. 한국당 장석춘 의원(구미시을) 추도사에는 ‘문재인 정부’가 ‘문제인 정부’로 잘못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드는데 혼신을 다하고 있다니. 이미 실패한 박 전 대통령을 앞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게 보필하겠다니. 국회의원은 대통령을 보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를 견제하는 자리입니다. 최고 권력자를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최고 권력자를 보필하겠다니. ‘백승주 의원이 끝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백 의원 추도사 내용이 언론을 통해 퍼지며 논란이 됐습니다. 백 의원은 이날 오후 추도사 내용에 대한 보도자료를 내어 “인쇄소의 실수로 이번 추도식 책자에 지난해 추도사 내용 일부가 실린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쇄업체에서 올해 추도사와 지난해 추도사를 섞어 책자를 찍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인쇄업체도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백 의원의 ‘화끈한’ 추도사는 ‘의리’가 아니라 ‘실수’였던 것 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에도 의문이 모두 풀리지는 않습니다. 인쇄업체에서 어떻게 지난해 추도사와 올해 추도사를 섞어 책자를 만드는 실수를 할 수 있는지, 추도식을 준비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와 구미시 모두 완성된 책자를 보고도 이런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상식적으로 잘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구미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았으니까.’ 고민 끝에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구미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고향인 구미를 한국 최대 내륙산업단지로 개발했습니다. 한때는 한국 총수출의 10%를 구미가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도권으로 기업이 많이 떠나면서 지금은 5%로 크게 줄었습니다. 구미는 지금 쇠락하는 도시입니다. 남유진 구미시장은 이번 추도사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찬란한 구미의 앞날을 지켜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걸까요.
불가능한 부탁입니다.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구미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수도권으로 이전한 기업을 다시 구미로 가져다 놓을 수도 없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38년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전혀 유효하지 않은 정치적 수사입니다. 그런데도 왜 정치인들은 구미에서 계속 이런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는 것일까요. ‘주민들에게는 유효하지 않지만 정치인들에게는 유효한 정치적 수사이니까.’ 고민 끝에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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