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색도 정체성도 없는 공연·전시로 어떻게 공감을 받겠어요.”
12년 전 땅끝 해남으로 귀농한 전병오(46) 야호문화나눔센터 대표는 3일 지역에서 문화텃밭을 가꾸는 철학을 이렇게 밝혔다. 그는 전남 해남군 현산면 만안리에서 지역의 역사와 유적, 인물을 바탕으로 ‘문화농사’를 짓고 있다.
서울에서 살던 전씨 부부는 25년 전쯤 남도답사 1번지로 떠오른 해남을 찾았다가 ‘여기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날 늦가을 밝은 햇살이 유난히 좋았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자고 가라’며 붙잡던 인정에도 끌렸다.
대학로에서 연극에 몸담았던 그는 30대 중반이던 2006년 불현듯 옛 꿈을 기억해냈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 살기로 했다. 길게 여행을 한다는 심정으로 해남으로 향했다. 생면부지의 타향이라 후배의 부모가 사는 마을을 찾아 의지했다. 농사는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웠다. 하지만 한눈 안 팔고 열심히 일했다. 쌀농사 1.5㏊, 콩농사 2.5㏊를 짓느라 트랙터까지 장만했다. 마을에서 주민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3년이 걸렸다. 그가 정착하자 후배 4명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의 집 옆 20㎡짜리 곡식창고에 둥지를 틀었다.
해남문화나눔센터는 미래세대를 위해 ‘어린이 문화농부 이음’과 ‘사뿐사뿐 글고양이 학교’ 등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해남문화나눔센터 제공
“농산어촌에 기반을 둔 지역 이야기를 소재로 문화활동을 해보기로 했어요. 해남의 유적과 인물을 활용해 참여자가 주도하는 공연과 전시를 시도하는 거죠.”
전씨는 논밭농사를 줄이고 조금씩 문화농사를 늘렸다. 해남문화원에 다니며 해남 속으로 한발짝 더 깊숙이 들어갔다. 먼저 해남의 무형문화재인 ‘강강술래’를 전승하는 사회적기업 ‘더 술래문화’를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명량해전의 배후기지였던 해남 우수영의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했다. 군청에 속한 문화인력으로 <꽃보다 우수영>, <슈퍼스타 우수영> 등을 제작하는 데 열정을 쏟기도 했다.
2014년에는 야호문화나눔센터를 설립했다. 강사 13명과 출연진 30명으로 유아부터 노인까지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야호는 ‘들을 좋아하다’(野好), 아이들이 신나게 외치는 소리, 땅을 딛고 사는 이들의 기를 살리자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야호센터는 해남 출신 시인 김남주·고정희의 일대기와 시 정신을 담은 시극을 문화원과 생가터에서 공연했다. 2015년 12월 평화의 소녀상 제막 때 지역에 살던 일본군 위안부 공정엽(2016년 작고) 할머니의 아픔을 극화한 <소녀들>을 무대에 올렸다. 해남의 지역아동센터 16곳에서 ‘어린이 문화농부 이음’과 ‘사뿐사뿐 글고양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제작된 아동극 <해남에서 온 어린 왕자>는 지난 8월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마을의 초청 공연에서도 갈채를 받았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