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광주시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종합관 옆에 있는 문용동 전도사의 추모비. 정대하 기자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의 항쟁 거점이었던 옛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의 폭약을 안전하게 관리하다가 진압에 나선 계엄군에 숨진 문용동(당시 27·전도사)을 군 당국이 매수된 ‘프락치’로 둔갑시켰다는 주장이 나왔다. ‘의인’ 문용동의 삶과 ‘휴머니즘 정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일 김형석(통일과역사연구소 소장) 박사가 최근 발표한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란 글을 보면, 문용동은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가담한 뒤 전남도청 지하실 무기고의 무기를 안전하게 관리하던 ‘폭약관리반’으로 활동했다. 당시 시민군은 광주시민들한테서 회수한 총 등이 도청 주변 화단과 수위실에 쌓이자 무기를 전남도청 지하실로 옮겼다. 이 가운데 다이너마이트는 5월21일 전남 화순탄광에서 빼내 온 것이었다. 김 박사는 “당시 폭약이 도청 반경 3㎞ 이내를 파괴하고 광주 시가지를 반파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고 밝혔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군 폭약관리반은 5월23일 자연스레 결성됐다. 문용동, 김영복(26·택시운전사), 양홍범(20·권투선수), 박선재(22·송원전문대 휴학생), 정남균(21), 이혁(19·인천교대 학생), 이경식(23·조선대 학생), 강남열, 정곤석(20·고교 중퇴) 등 9명이 참여했다. 군 복무 때 폭약 제거법 등을 다뤘던 김영복은 “(폭약) 위력을 실감하고 자진해 관리에 나섰다”고 증언했다. 문용동은 첫날 “(폭약을)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라고 말했다.
80년 5월 당시 문용동은 호남신학대 4학년이었다. 그는 5월18일 상무대 교회를 다녀오던 중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폭행당하던 노인을 돕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5월21일 결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어떻게 배상해줄 것인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라…’(80년 5월22일 문용동 일기 중)
분수대에 놓인 32구의 주검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 문용동은 리더 역할을 했다. 폭약관리반으로 함께 활동한 김영복은 문용동에 대해 “말씨는 부드럽고 조용하며 매우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했다. 양홍범도 그에 대해 “천사같은 사람이여. 천사가 있다면 그 사람이여”라고 말했다.
김형석 박사는 “이것이 그가 폭약관리반으로 자원하게 된 계기였다”며 “도청 지하실의 폭약이 폭발하면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 문용동이 폭약 뇌관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고 분석했다.
뇌관 제거 작업은 비밀리에 시작됐다. 문용동은 김영복과 “위기관리를 위한 안전조치로 계엄사를 찾아 뇌관 (분리) 작업의 도움을 청하기로 비밀리에 결의했다”고 한다. 광주에 주둔한 전투교육사령부가 있던 상무대의 교회에서 1979년 7월부터 전도사로 시무했던 문용동이 군과 소통하기가 쉬웠다. 이들은 5월24일 상무대 계엄분소를 찾아 김기석 계엄사 부사령관에게 ‘도청 무기고에 엄청난 폭약이 적재되어 위험하니 군 전문가를 투입시켜 뇌관 제거 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에서는 탄약검사사였던 군무원 배승일(26)을 보냈다. 김형석 박사가 언급한 ‘10인의 의인’은 시민군 폭약관리반 9명과 배승일을 말한다.
뇌관 제거까지 16시간여가 걸렸다. 배승일은 “5월24일 밤 8시30분부터 도청 내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손가락 길이 정도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 뭉치 2100개를 제거한 뒤 수류탄 450여발의 신관 제거를 마쳤다”고 증언했다. 이 작업은 5월25일 새벽 5시부터 재개돼 오후 1시에 수류탄과 최루탄 신관 제거 작업이 끝났다. 배승일은 “다이너마이트(산업용)가 대부분이었고, 티엔티(군사·산업용)도 일부 있어서 두 종류의 폭발물이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문용동은 5월27일 새벽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에 사살됐다. 5월26일 옛 전남도청을 찾아온 누나에게 그는 “내가 여기서 나가면 누가 여기를 지키겠는가?”라며 귀가하지 않았다. “무기고에도 총소리가 세차례나 들렸다. ‘나오면 살려준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더니 ‘악’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김 박사는 “당시 군부가 문용동의 순수한 희생을 왜곡하고 계엄군 프락치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고 분석했다. 계엄사령부가 진압 뒤인 80년 5월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엔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히 폭도로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약, 폭발장치 뇌관을 빼어 못 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정에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켰다”고 돼 있다. 군 기록 중 ‘요원’은 배승일이고,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는 문용동을 지칭한다.
하지만 5·18 당시 문용동의 일기와 시민군의 증언을 종합 분석한 김 박사는 “군이 폭약관리반의 활동을 왜곡한 것은 계엄군 진압작전을 합리화·정당화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은 당시 ‘도청 내에서의 거점에서는 엄청난 양의 티엔티 폭약을 장전하고 자폭태세를 갖추는 등 더 이상 폭도들의 기도를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참화가 일어날 것이 예측되기에 이르렀다’며 무력진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용동은 시민사회에서도 군의 ‘공작요원’으로 오해받았다. “계엄군들이 정보요원들을 시켜 다이너마이트를 제거시켰다”는 것이었다. 김 박사는 “이 때문에 문용동과 폭약관리반은 계엄군과 시민군 양쪽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며 “문용동 등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평가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그가 군의 ‘프락치’였다면 상황종료 후 도피했을 것인데 역할을 끝까지 수행했고, 생존한 폭약관리반원들도 계엄군한테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고 한다.
최근 문용동의 삶과 정신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용동의 희생은 “광주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판단”으로 ‘평화정신’과 ‘휴머니즘’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계에선 그를 순교자로 추서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지난해 9월29일 열린 총회에서 문용동을 순직자로 지정했다. 김 박사는 “5·18 당시 문용동 등 10인의 의인은 촛불을 켜고 폭탄 뇌관을 분리하며 폭약 뭉치를 분해해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구했다”며 “그런데도 이들은 프락치란 누명을 쓰고 지역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37년의 세월을 살아왔다.이들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인지를 놓고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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