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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5월 체험’ 그들의 목소리로 담았죠”

등록 2018-01-04 19:19수정 2018-01-04 20:22

[짬] 5·18 여성다큐 만든 김경자 영화감독
5·18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영상에 담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다큐멘터리(80분)를 제작한 김경자 감독. 김경자 감독 제공
5·18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영상에 담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다큐멘터리(80분)를 제작한 김경자 감독. 김경자 감독 제공

날은 흐렸고, 지하실은 음습했다. 김경자(47) 감독은 지난해 10월 차명숙(57)씨와 광주광역시의 옛 505보안대를 찾았다. 지금은 5·18 사적지로 지정됐지만, 80년 5·18 당시 가두방송의 주인공이었던 차씨가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곳이다. 37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찾았던 곳에서 그는 “높은 담과 숲, 30여 계단을 지났던 지하실…”의 기억을 어렵사리 기억해 냈다.

옛 505보안대 터는 이 부대가 2005년 11월 31사단으로 이전한 뒤 8동의 건물이 빈 채로 남아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의 지붕은 뻥 뚫려 있고, 흰 페인트가 칠해진 본관 건물엔 깨진 유리가 흩어져 있다. 2층 벽엔 ‘보안을 유지합시다’라는 표어가 아직 붙어 있다. 당시 ‘간첩’으로 몰려 허위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을 당했던 차씨에게 505보안대는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곳”이었다. 김 감독은 “그냥 연출하지 않고 차씨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도 눈물이 가장 많이 났던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5·18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기억과 현재의 삶을 영상에 담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다큐멘터리(80분)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11월 광주 독립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보인 뒤 지난해 12월30일 경북 안동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안동에서 영화 시사회가 열린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차씨가 지금 안동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81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한 그는 89년 안동으로 가 홍어 요리를 주로 파는 ‘행복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차씨는 “안동에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모른다. 안동 지역 청년단체 회원들이 나서서 기획해 이 영화를 상영하고 김 감독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가두방송 차명숙 박영순씨 등
항쟁 참여 여성 10명 인터뷰로
‘외롭고 높고 쓸쓸한’ 다큐 제작
최근 차씨 사는 안동서 시사회

“작품 보완해 관객들과 만날 터
음식 이야기 다큐도 만들겠다”

이 작품이 개봉되기까진 무려 6년 남짓 걸렸다. 김 감독은 “80년 광주, 오월을 겪었던 여성들의 경험과 활동을 여성들의 목소리로 담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녀들에게 무엇이었을까를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4월 ‘5월여성제’를 한다는 말을 듣고 행사장에 찾아가 여성 5·18 참가자들을 처음 만났다. 차씨뿐 아니라 5·18 마지막 항쟁이 있었던 5월27일 새벽 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씨와 여성노동자였던 윤청자·김순이·최정님씨, 지역의 민주여성단체인 ‘송백회’의 송희성·이윤정·임영희씨, 시민군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었던 여성 등 10여명을 인터뷰했다. “중간에 조금 쉬기도 했지만, 조금 더 다듬고 싶어서 완성을 미루고 미뤘지요.”

5·18 마지막 새벽 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씨. 정대하 기자
5·18 마지막 새벽 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씨. 정대하 기자
영화의 제목은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들어 있는 시어다. 영화인 조대영씨는 “5·18은 남성과 명망가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고, 대자보를 쓰고, 주검을 수습했으며 가두방송을 했고, 밥을 짓기도 했다”며 “김 감독은 항쟁 당시는 물론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편집을 최소화하고 자막도 배제한 채 묵묵히 지켜보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자극적인 요소가 없어 밋밋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기름칠을 안 한 담백한 영화”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감독은 전남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2008년 전남대 앞 청년글방에서 영화 읽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영상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10여년 동안 그는 <민수의 대인시장>(2009), <나 지금 여기 있어>(2011), <소인의 노래>(2015), <움직이는 가게>(2017) 등 10여편을 제작했다. 특히 김 감독은 “강요된 망각 때문에 기억에서 많이 지워졌지만, 억압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전라도 소안도는 한국전쟁 때 250여명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그 섬의 슬픈 역사를 이야기해주셨던 김남천 어르신이 작업 도중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김경자 감독이 80년 5·18 당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여성을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자 감독 제공
김경자 감독이 80년 5·18 당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여성을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자 감독 제공
김 감독은 작품 제작에 드는 모든 비용을 사비로 충당한다. 그래서 틈틈이 통계 관련 일을 하고 논문 작성법을 강의하거나 미디어 교육 등 아르바이트를 한다. 요즘은 프리랜서로 상업광고 영상도 제작하고 있다. 김 감독처럼 광주에서 독립영화를 하는 영화인은 30여명에 불과하다. 먹고사는 문제가 ‘큰일’이어서 보통 2~3년에 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김 감독은 “작품을 위해 많이 찍어야 하고 시간을 들여 편집도 해야 하는데, 이 작품이 돈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다들 경제적으로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오는 3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으로 광주에 독립영화전용관이 생기는 것이 작은 희망이다.

김 감독은 오월 여성 영화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후속 작업을 이어갈 방침이다. 영화 사운드 등 후반작업을 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김 감독은 “오월 광주 여성의 이야기를 다른 지역에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수정하고 보완해 관객들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주변 동료들은 후반작업이 끝나는 대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해보라고 권유해 고민하고 있다. 그는 “5·18 자료를 봐가며 이렇게 만들어놓았어도 부끄럽고 속으로 많이 찔리고 그런다”며 “오월 여성 작품을 잘 마무리해 짐을 턴 뒤, 우리 몸에 중요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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