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열린 전남 해남군 유모차대행진. 해남/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아빠는 유모차를 끌 수 없나요? ‘유모차’(乳母車)에 ‘어미 모(母)’자가 들어가 평등육아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아요. 아이가 중심이 되는 ‘유아차’(乳兒車)'가 어떨까요?”
서울시는 지난 6월 초 실시한 ‘성평등 언어사전 시민 참여 캠페인’에서 시민들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이 캠페인은 직업, 업무 용어, 신조어, 외래어 등에서 성차별적 표현을 발굴해 개선하자는 취지로 서울시와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함께 실시했다. 시민들의 제안은 608건이나 들어왔다. 서울시는 전문가 자문회의를 꾸려 시민들의 제안을 검토한 뒤 개선이 시급한 성차별 언어 10가지를 선정해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 결과를 29일 발표했다. 7월1일부터 7일 서울시 성평등주간에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시민들에게 성차별 언어 개선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시민들의 제안 608건 중 가장 많이 접수된 제안 100건은 직업인 명칭 앞에 붙인 ‘여’(女)자를 떼어달라는 것이었다. 여직원, 여교수, 여비서, 여군, 여경처럼 직업인 명칭 앞에 여성일 경우 ‘여’자를 붙여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 ‘남’자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 시민들은 “직원, 교수, 비서, 군인, 경찰로 부르자”고 제안했고, 서울시가 이를 개선해야 할 성차별적 언어 1순위로 꼽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 중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에만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라는 교명이 붙는 것도 서울시는 개선사항 2순위로 꼽았다. 남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남자중학교’, ‘남자고등학교’라는 교명을 붙이지 않는 것처럼 ‘○○중·고등학교’라고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제안 608건 중 50건 접수돼 두번째로 많았던 지적은 어떤 일이나 행동을 처음한다는 의미로 붙이는 '처녀'를 '첫'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처녀작을 총각은 못 만드나요?”라며 ‘처녀’라는 표현이 성차별 언어라고 지적했다. 자문회의 전문가들은 ”‘처녀작’, ‘처녀출판’, ‘처녀비행’ 등은 ‘첫 작품’, ‘첫 출판’, ‘첫 비행’ 등으로 쓰는 게 맞다”며 개선할 표현으로 선정했다.
성차별적 의미가 담긴 단어들에 대한 시민들의 개선 요구도 많았다. 인구 감소로 인해 최근 부쩍 많이 쓰이는 단어 ‘저출산’(低出産)은 아기가 적게 태어난다는 의미인 ‘저출생’(低出生)으로 쓰는 게 적절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저출산’(低出産)에 쓰이는 ‘낳을 산(産)’자는 여성이 아기를 적게 낳는 것을 뜻해 인구문제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어린 아이를 태워 밀고 다니는 수레를 뜻하는 ‘유모차’(乳母車)에도 ‘어미 모(母)’자가 포함돼 여성에게 육아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서울시는 유아가 중심이 되는 표현 ‘유아차’(乳兒車)로 개선하자고 했다. 이와 함께, 여성의 신체 기관인 ‘자궁’(子宮)도 성차별적 언어로 선정됐다. ‘자궁’(子宮)에 쓰이는 한자를 ‘아들자’(子)가 아닌 ’세포 포’(胞)를 써 ‘남자 아이를 품은 집’이 아닌 ‘세포를 품은 집’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는 ‘미혼’(未婚)이 아닌 ‘비혼’(非婚)이 올바른 표현이다.
더불어, 여성을 가리키는 3인칭 대명사 ‘그녀’도 성차별 언어로 선정됐다. 영어 ‘she’를 번역한 일본어 ‘피녀’(彼女)가 어원인 이 단어는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된다. 시민들은 “‘그남’이라는 말이 없듯 ‘그녀’ 대신 ‘그’를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여성을 대명사로 지칭할 때 ‘그’ 또는 ‘그 여자’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성범죄의 심각성이 드러나지 않는 단어 ‘몰래카메라’, ‘리벤지 포르노’는 각각 ‘불법촬영’, ‘디지털 성범죄’가 옳은 표현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저출산’ 용어는 처음엔 출산의 주체인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갖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개선하자는 의미로 나왔으나 최근 정부가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드는 등 여성을 출산도구화하는 상황에선 ‘저출산’이라는 말이 여성들에게 족쇄가 됐다. 시대가 달라지면 말도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 쪽 친척들만 높여 부르는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나 여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미혼모라는 말들도 성차별 언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대체 용어가 마땅치 않아 논쟁 중이다.
김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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