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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로 훼손 현장 가보니…‘4·3 순례길’도 사라질 위기

등록 2018-08-15 05:00수정 2018-08-15 10:40

비자림로의 훼손된 삼나무 숲길엔 관광객 찾아와
“제주의 자연은 모두의 것…잘 보존하는 게 의무”
제주 비자림로의 대천교차로에서 송당 방향으로 가는 구간에 도로 양쪽으로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
제주 비자림로의 대천교차로에서 송당 방향으로 가는 구간에 도로 양쪽으로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
지난 13일 오후 제주시 구좌읍 대천교차로에서 송당 방향 왕복 2차로의 비자림로 삼나무숲길 구간은 폭염 속에서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양쪽에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금백조로 어귀에 들어서자 도로 오른쪽으로 ‘공사 중’을 알리는 선간판이 보였고, 휑하니 훼손된 삼나무 숲길이 드러났다.

차를 타고 오가는 이들 중 일부는 훼손된 숲길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제주에 사는 김일수(35)씨는 “빠른 길을 만들려고 이렇게 숲길을 훼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제주도가 최근 비자림로 일부 구간의 도로를 넓히면서 베어낸 삼나무와 그 옆에 이를 반대하는 펼침막이 보인다.
제주도가 최근 비자림로 일부 구간의 도로를 넓히면서 베어낸 삼나무와 그 옆에 이를 반대하는 펼침막이 보인다.
세종시에서 왔다는 박종준(42)씨는 “가슴 한쪽이 크게 긁힌 느낌이다. 도로가 좁아 사고 위험이 크다면 교통 안전 시설을 확충해야지 숲을 훼손하면서까지 도로를 넓힐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여주에서 온 한정훈(30)씨는 “교통량을 봤을 때는 확장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차가 넘친다면 간이 주차장 정도 만들면 될 것인데, 이렇게 훼손한 것을 보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제주 비자림로의 벌채된 삼나무 숲길 옆을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제주 비자림로의 벌채된 삼나무 숲길 옆을 자동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식물과 생태 전문가들은 제주도의 삼나무 숲길 훼손이 경관적 가치를 무시했거나, 생태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김봉찬(54) 더가든 대표는 “이 곳은 애초 삼나무숲을 조성해 나무가 크면 벌목해 쓰려고 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경관이 아름다운 길이 돼버렸다. 길이 필요하다면 우회로를 내거나 일방통행으로 만들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과 4·3의 역사현장인 다랑쉬굴을 지나는 제주시 다랑쉬로도 확장·포장공사로 옛길의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과 4·3의 역사현장인 다랑쉬굴을 지나는 제주시 다랑쉬로도 확장·포장공사로 옛길의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제주생명의숲 국민운동 공동대표인 김찬수 박사도 “45년 이상 시간을 들여 숲을 조성했는데, 한꺼번에 많은 면적을 일괄로 제거하니까 문제다. 인공림이고 삼나무니까 잘라도 된다는 안일한 사고가 아름다운 숲을 파괴했다. 경관적 가치를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성산읍이장협의회와 주민자치위원회 등은 “비자림로는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도로다. 공사로 잘려나가는 삼나무들이 있겠지만 숲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공사 재개를 촉구하고 있다.

다랑쉬오름 쪽에서 용눈이오름 쪽으로 바라본 다랑쉬로.
다랑쉬오름 쪽에서 용눈이오름 쪽으로 바라본 다랑쉬로.
난개발은 비자림로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서 성산읍 수산리로 가는 손자봉교차로 인근에서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다랑쉬로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제주시는 지난해 12월부터 내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군도 89호선(서화~좌보미) 3.1㎞ 구간에 왕복 2차로 도로의 확장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길은 제주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희생된 11명의 유해가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과,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오름들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이 길은 공사가 진행되면서 직선으로 고쳐지고 있다.

다랑쉬로에 있는 제주4·3 당시 ‘잃어버린 마을-다랑쉬마을’과 그 옆의 고사한 팽나무가 도로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다랑쉬로에 있는 제주4·3 당시 ‘잃어버린 마을-다랑쉬마을’과 그 옆의 고사한 팽나무가 도로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제주4·3단체 관계자는 “걸으며 4·3사건을 생각할 수 있었던 역사 순례길 역할을 하는 곳인데 사라지는 걸 보니 안타깝다. 곧게 뻗은 길만 좋은 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료들과 함께 휴가철을 맞아 다랑쉬굴을 찾아가던 이순일(34·서울)씨는 “이 길도 빠른 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제주도의 자연은 온 국민의 것이다.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제주를 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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