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저유소 화재를 일으킨 풍등과 같은 종류의 풍등을 경찰 관계자가 들어보이고 있다. 박경만 기자
경기도 고양 저유소 폭발 화재의 원인이 된 풍등을 날린 혐의로 체포된 스리랑카 이주 노동자 ㅂ(27)씨에 대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기로 했다. ㅂ씨는 경찰에 긴급 체포된 지 48시간 만인 10일 오후 4시30분께 풀려났다. “힘 없는 외국인 노동자를 희생양 삼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일산동부경찰서에서 풀려난 ㅂ씨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ㅂ씨 변호를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최정규 변호사는 “풍등을 날렸다가 불이 난 것을 가지고 외국인 노동자를 구속한다면 국제적인 망신”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인과 관계와 고의성, 예측 가능성으로 비춰볼 때 ㅂ씨가 풍등을 날린 행위를 중실화 혐의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7일 고양시 저유소 화재 현장의 모습. 고양소방서.
지난 8일 ㅂ씨를 긴급체포한 경찰이 9일과 10일 중실화 혐의로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와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스리랑카 노동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말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날 오후 4시30분까지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힘없는 20대 스리랑카 노동자에 대한 처벌은 부당합니다” 등 게시물이 30건 이상 올라왔다. 소셜미디어나 기사 댓글에도 “관리 시스템 부재를 외국인 노동자의 잘못으로 몰고가지 마라”, “사회적 지위나 국적을 떠나 공정한 수사를 바란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아시아의 친구들’의 김대권 대표는 “단순 과실 정도는 모르겠지만 중실화 혐의를 적용한 것은 무리다. 위험성을 알고 했다는데 풍등 하나로 거대한 유류탱크를 날릴 수 있다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위험 시설이면 인근 주민에게 충분히 고지해야 하는데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심지어 반경 1㎞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는 8년째 풍등 날리기를 했지만 한번도 금지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8일 화재가 잡힌 뒤의 고양시 저유소 모습. 박경만 기자.
정부도 ㅂ씨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에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한정(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찰이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런 졸렬한 대응이 어디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우선 졸속적으로 원인에 대한 근본 분석이 없이 외국인 노동자 한 분한테 정말 다 책임을 (떠넘겼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화재 원인과 관련해 “풍등을 원인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유증기가 화기에 쉽게 노출되는 관리 자체가 문제인지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경찰은 수사팀을 확대해 송유관공사쪽 과실 혐의에 대해 집중 수사할 방침이다. 폐회로텔레비전(CCTV)를 분석한 결과 휘발유 탱크 옆 잔디에 풍등이 추락해 불이 붙어 폭발하기까지 18분 동안 대한송유관공사 측에서 화재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박경만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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