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 이야기되고 안주 되고,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대 너무 아름다워요, 그대 너무 부드러워요, 그대 너무 맛이 있어요.”
저는 가수 강산에의 노랫말 속 주인공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명태’입니다. 생태, 동태, 선태, 찐태, 노가리, 북어, 코다리, 망태, 조태, 낙태, 추태, 짝태, 왜태, 원양태 등 절 부르는 이름도 천차만별입니다.
조금 있으면 불어닥칠 칼바람이 부는 날에 더욱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쑥갓 향 가득한 국물 속에 생태가 푸짐하게 들어 있어 개운함을 느낄 수 있는 생태찌개는 겨울이면 생각나는 음식 중 하나죠.
옛이야기 하나 해볼까요? 명태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서유구가 1820년께 펴낸 것으로 추정되는 책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명태가 다산하여 전국에 넘쳐흐른다”라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1871년 발간된 조선 후기 문인 이유원의 저서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보면, 함경도 명천에 사는 어부 태씨가 자신이 낚은 물고기 이름을 몰라 명천의 ‘명’과 자신의 성인 ‘태’를 따서 명태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소 150여년 동안 한국인의 밥상에 자주 오른 ‘국민 생선’이 바로 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국민 생선이라는 점은 주변 나라들이 사용하는 명태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를 일본에서는 멘타이(또는 스케토다라), 중국에서는 밍타이위(또는 샤쉐), 러시아에서는 민타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들은 모두 한국어 ‘명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원조 한류 스타로 ‘명태의 조국’은 대한민국인 셈이죠.
1970~1980년대만 해도 동해 앞바다는 제 주무대였습니다. ‘개가 명태를 물어가도 쫓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1950년대 2만4천톤(t), 1960년대 1만7천톤에 머물던 명태 어획량은 1970년대 7만톤, 1980년대 7만4천톤까지 치솟았습니다. 1981년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만톤을 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6천톤으로 떨어지더니 2000년대 100만 이하, 2007년엔 1톤 이하로 급감하다 2008년엔 어획량 ‘제로’를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사실상 동해 앞바다에서 사라진 것은 수온 변화 등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정부 탓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3년 수산자원보호령으로 금지했던 ‘노가리(새끼 명태)잡이’를 정부가 1970년 전면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2~3년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까지 깡그리 잡아버렸습니다. 노가리잡이가 극심했던 1976년엔 전체 명태 어획량의 91.9%가 노가리였을 정도였습니다. 노가리를 씹으며 ‘노가리’를 푸는 풍경은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뒤늦게 정부가 나섰습니다. 1996년 10㎝ 이하, 2003년엔 15㎝ 이하, 2006년 27㎝ 이하의 명태를 잡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36년 동안 이어진 ‘학살’로 우리는 동해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태살리기 목적으로 동해 앞바다에 방류된 어린 명태의 모습. 강원도 한해성수산자원센터 제공
사람들이 다시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4년 2월부터입니다. 우리가 먹는 명태를 전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양수산부는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가동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장 알을 밴 명태를 구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씨 마른 명태’를 구하는 것 자체도 힘든데 알을 밴 명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현상수배 전단입니다. 고민 끝에 해양수산부는 ‘집 나간 명태를 찾습니다’라고 적힌 전단을 동해안 각 항구에 뿌렸습니다. 전단은 명태 보존 상태에 따라 최저 5만원에서 최고 50만원의 포상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 참 달라졌습니다. 개가 물어가도 거들떠보지 않던 우리가 ‘현상금’까지 붙는 귀한 몸이 됐으니까요.
현상금을 내걸자 우리를 잡았다는 제보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명태를 구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자연산 명태는 스트레스에 약해 그물에 걸리면 오랜 시간 버티지 못하고 폐사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를 통해 살아있는 명태 203마리를 구했으나, 다 죽고 현재 살아있는 명태가 3마리에 불과합니다.
2014년 3월에는 죽은 명태에서 얻은 알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새끼 9만4000마리를 부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75일만에 모두 폐사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이듬해 1월, 알을 밴 채 살아있는 명태 1마리를 확보했습니다. 강원도 한해성수산자원센터 연구진은 이 명태에서 알을 얻어 그해 2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명태 수정란 53만개를 확보해 부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세대 인공명태’의 탄생입니다.
1세대 인공명태는 태어나자마자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여름철 수온이 올라가면 적정 수온인 10℃를 유지하기 위해 연구진은 해양심층수를 끌어왔습니다. 또 10℃에서도 생존하는 저온성 먹이생물과 고도불포화지방산(EPA, DHA)을 강화한 고에너지 명태 전용 배합사료까지 개발해 먹였습니다.
이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워 20㎝ 정도로 자란 1세대 인공명태 가운데 1만5000마리를 연구진은 강원도 고성 앞바다에 방류하고, 특별히 선발한 200마리는 산란이 가능한 어미(35㎝ 이상)로 키웠습니다. 이 중 7마리가 2016년 9월 산란에 성공했습니다. 마침내 명태 완전양식에 성공한 것입니다. 명태 완전양식 기술은 인공적으로 수정란을 생산·부화시켜 키운 어린 명태가 어미가 돼 다시 수정란을 생산하는 순환체계를 갖춘 것을 말합니다.
프로젝트를 추진한 지 2년 만에 명태 완전양식 기술에 성공한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수산 강국인 일본도 2012년 1세대 인공명태 생산에는 성공했지만 2세대까지 이어지는 완전양식에는 실패했습니다. 완전양식은 우리나라가 처음입니다.
인공명태 생산에 성공한 해수부는 동해 앞바다에 명태를 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1만5000마리, 2016년 1000마리를 방류했고, 지난해엔 완전양식으로 생산된 명태 30만 마리를 방류했습니다.
양식에 성공한 어린 명태의 모습. 강원도 한해성수산자원센터 제공
명태가 우리 바다에서 사라진 2008년 이후 한국은 해마다 22만톤(t) 안팎의 명태를 러시아 등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명태 국내 생산과 종묘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어 연간 4800억원의 수입대체 효과와 어민들의 소득향상 등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회복의 길은 멉니다.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해수를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 이후 약 31만6000마리가 방류됐지만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된 방류 개체는 3마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가 2016년부터 연근해에서 잡은 명태 1701마리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이에 대해 연구진들은 오히려 고무적인 결과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 방류한 30만 마리는 이제 겨우 25㎝ 정도까지 자랐습니다. 아직 27㎝가 되지 않아 조업 금지 대상입니다. 지난해 방류한 30만 마리는 어민들이 잡을 수 있는 크기로 자라지 않은 만큼 실제로는 2016년 이전에 방류한 1만6000마리 가운데 3마리가 확인된 셈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선 자원회복에 성공한 뚝지나 도루묵처럼 방류량을 더 늘려야 합니다. 강원도는 지난해 600만 마리 등 지금까지 뚝지 종자 2300만 마리를 방류했습니다. 뚝지는 동해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겨울철 별미로 뜨거운 물에 데쳐 먹는 숙회, 조리해 먹는 알탕, 두루치기 등 많은 미식가가 동해안을 찾게 하는 효자 어종입니다.
‘명태 아버지’로 불리는 서주영 강원도 한해성수산자원센터 연구사는 “넓고 넓은 동해에 방류한 명태가 3마리나 확인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잡히지 않은 인공명태는 더 많을 것이고, 방류한 어린 명태가 살아남아 그물에 잡힐 정도의 크기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방류량을 늘리고 연구개발에 좀 더 매진한다면 명태 자원회복의 꿈도 이뤄질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