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인문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인문 테마 여행’에 참여한 시민 30여명이 11일 오후 전남 완도군 신지도를 찾아 원교 이광사가 심었다는 `원교목'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시민자유대학 제공
“원교 선생님이 심은 소나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지요.” 11일 전남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에서 만난 황곡연(78)씨는 마을 앞 ‘원교목’이 조선 후기 양명학자 이광사(1705~1777)가 심은 나무라고 전했다. 원교라는 호를 쓴 이광사 선생은 정치적인 이유로 1762년에 신지도로 유배를 와서 15년동안 살다가 세상을 떴다. 황씨는 “나의 7대조 황치곤 할아버지 댁에서 원교 선생이 사셨다. 그런데 멀리 바다와 붉은 황토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소나무를 심으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11일 전남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에서 만난 황곡연(78)씨가 마을 앞 ‘원교목’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이날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인문 테마 여행’에 참여한 시민 30여명은 신지도를 찾아 이광사가 살았던 금곡리 등지를 둘러봤다. 신지도는 조선 시대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절도정배지’ 7곳 중의 한 곳이었다. 이날 동행한 장복동 시민자유대학 학장은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등엔 41회에 걸쳐 46명이 유배됐던 곳으로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 동국진체 완성자인 이광사(1705~1777) 선생의 초상화.완도군 누리집
이광사는 15년동안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서예의 체계적 이론서인 <서결>을 완성해 가장 한국적인 서체의 모태가 된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로 꼽힌다. 오병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18세기에 이서-윤두서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는 이광사에 이르러 대중적인 기틀이 마련됐다.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가 담겼던 이 글씨체는 호남과 불가 선승을 통해 맥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 이광사(1705~1777)가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 전남 완도 신지도 적거지.시민자유대학 제공
완도군은 이광사의 학문과 저술, 유배지에서의 삶을 역사문화콘텐츠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군은 이광사가 유배와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집을 매입하고 인근 900m를 ‘이광사 문화거리’로 조성할 방침이다. 이에 발맞춰 ‘원교 이광사기념사업회’도 지난 5일부터 신지면 문화센터에서 15일까지 ‘원교 이광사 서예 특별전’을 연다. 정지원(76) 원교 이광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원교 선생님의 진품 240점이 한 자리에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원교 이광사기념사업회’도 지난 5일부터 신지면 문화센터에서 15일까지 ‘원교 이광사 서예 특별전’을 연다. 원교 이광사기념사업회 제공
유배지 신지도에서 창작·저술활동을 했던 지식인 가운데엔 정약전(1758~1801)도 있다. 정약전은 1801년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질 때까지 8개월동안 이곳에 머물며 동생 정약용에게 보낸 시 2편을 남겼다.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1855~1935)도 1887~1891년 신지도 송곡리에 유배됐다. 완도군 쪽은 “유배 지식인들의 학문 활동 등을 담은 역사문화관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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