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화씨가 4·3 수형인 재심 재판에서 공소 기각으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70여년 동안 따라다닌 붉은 낙인을 지울 수 있게 돼 너무 기쁩니다.”
법원이 17일 제주 4·3 당시 억울하게 수형 생활을 한 이른바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 사건 선고 공판에서 무죄 취지로 공소를 기각하자 양일화(89·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씨의 두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렀다. 70년 넘게 지니고 산 ‘붉은 낙인’이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주마등처럼 옛일이 생각났다. 1948년 11월20일 토벌대의 소개령이 내려지고 마을이 불타자 부모는 한림으로, 양씨는 제주읍내(지금의 제주시) 백부댁에서 생활했다. 그해 12월 초 길거리에서 우익청년단에 우연히 붙잡힌 양씨는 “경찰서 취조실에 장작불을 때기 위해 갖다 놓은 장작으로 정신없이 맞아 몸뚱이가 붓고 살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양씨는 그곳에서 열흘 정도 살다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을 맡은 군인이 ‘아무개 일어서’ 하고 이름을 불러 일어서면 ‘너 이러이러한 일 했지?’ 하고 물었다. ‘예’ 하면 이름을 써서 양쪽으로 나눠 형무소로 보낼 사람과 사형할 사람을 나눠 앉혔다. 하루에 수백명이 재판을 받았다.
양일화씨는 평소 자신의 인생 역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이 그림은 제주경찰서에서 인천형무소로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초 목포를 거쳐 인천형무소로 이송됐다. 왜 가야 하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몰랐다. 양씨는 그곳에서 자신이 ‘5년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950년 6·25가 터져 북한군이 인천까지 들어오자 형무소 문이 열렸다. 인민군은 재소자들을 데리고 개성으로 갔다. 따라가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었다. 양씨는 그곳에서 한달 동안 훈련을 받고 내무서원이 돼 광주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같이 따라나섰다. 길을 모르는 양씨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경북 상주의 한 산에서 후퇴하다 국군한테 발각됐다. 함께 가던 많은 인민군이 죽었지만, 그는 용케도 제주 출신 군인을 만나 살아남았다. 부산의 가야포로수용소를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1년6개월 남짓 살았다. 고향의 부모는 한국전쟁이 나자 독자인 양씨가 죽은 것으로 알고 생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수용소 생활이 끝난 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이번에는 육군에 입대해 52개월을 군인으로 살았다.
양일화씨는 평소 자신의 인생 역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이 그림은 1949년 인천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이다.
양씨는 “처음 재심 신청할 때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몇차례 법원에 가면서 혹시 유죄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살아 있을 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잠을 자도 눈을 떠서 자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잘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양일화씨가 4·3 수형인 재심 재판에서 무죄 취지의 공소 기각 판결이 난 데 대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양씨는 “이번에 무죄 판결을 받지 못했으면 눈 감고 죽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이번 판결로 내가 무죄라는 것을 공인받았다는 게 너무 기쁘다. 특히 내 자손들에게 편안한 마음이 들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고 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