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동구 계림동 헌책방 거리에서 40여 년 남짓 책방을 꾸려온 대교서점 김말수 대표.
“책 도둑은 도둑질이 아니었제. 다들 어렵긴 했어도 그 시절엔 인정이란 거시 살아 있었어.”
광주시 동구 계림동 헌책방 거리에서 만난 김말수(84) 대교서점 대표가 좋았던 옛 시절을 돌이키며 회한에 잠겼다. “딱허게 생긴 총각이 내 눈치를 보며 법전을 읽다가 슬그머니 들고 나가드라고. 하도 짠해서 보고도 못 본 척 해부렀어. 근디 몇 년 지나서 법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찾아와서는, 그때 책 돌라가서 미안했소잉, 그러더랑게.”
계림동 오거리에서 광주고에 이르는 700m 남짓한 이 거리엔 한 때 헌책방 60여 곳이 있었다. 1973년 이곳에 자리 잡은 김씨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헌 책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지만,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찾는 이들이 점차 줄더니, 인터넷을 통해 책을 사고팔게 되면서 폐업하는 서점들이 속출했다”고 전했다. 현재 이 거리에 헌책방은 7곳만 남아 있다.
이 헌책방 거리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가 19일 시동을 건다. ‘광주 헌책방 여기-있음’이라는 행사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오후 4~6시 광주고 정문 옆 커피유림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다. 광주고서점, 광일서점, 대교서점, 문학서점, 유림서점 등 1970년대부터 이곳에서 영업해온 헌책방 주인들이 나와 거리에 새 숨결을 불어넣을 ‘계림동 처방전’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 자리에선 과거 헌책방 거리의 명성과 추억,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소개되고, 헌책방 단골 4명이 결성한 시민밴드 보크콰르텟의 공연도 펼쳐진다.
이번 행사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으로 헌책방의 ‘젊은 단골’인 책문화기획자 유휘경(28)씨의 반짝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유씨는 “옛날에 책을 팔러왔던 까까머리들이 어른이 돼 자녀들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온다”는 헌책방 주인의 회고담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무질서하게 쌓아놓은 듯한 헌책 더미 속에서 고객이 원하는 책을 족집게처럼 찾아내는 책방 주인들의 노하우도 신기했다. 유씨는 유림서점 2세대로 찻집 ‘커피유림’을 운영하는 유수진(42)씨와 헌책방 거리의 존재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인문학적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공동 기획했다.
광주시 동구 계림동 헌책방 거리에서 `광주 헌책방 여기-있음'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마범석, 유휘경, 유수진씨.유휘경씨 제공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서울 미래유산으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은 관광명소로 지정됐지만, 광주의 계림동 헌책방 거리의 미래는 여전히 어둡다. 전남대 문화예술특성화사업단이 2009년 ‘계림동 책마을 특성화 사업’을 벌이며 헌책방의 간판을 새로 고쳐 달고 책방들이 보유한 중고서적들을 전산화하는 작업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꾸준히 이어지지 못했다.
유휘경씨는 “많은 젊은이들이 계림동 헌책방 거리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른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의 사라져 가는 기억을 소환하고, 침체에 빠진 거리를 새로운 문화명소로 되살리고 싶다”고 했다. 이날 헌책방 주인들이 내린 ‘처방전’은 문서로 정리돼 동구와 광주시에 전달된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유휘경씨 제공
광주시 동구 계림동 헌책방 거리의 산증인 광일서점 안 헌책 더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