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돌을 앞두고 전북의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조명하는 행사가 열렸다.
사단법인 예랑, 애국지사 김춘배기념사업회, 평화통일 100인회의 등은 지난 24일 오후 전북 전주시 중부비전센터에서 ‘전북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를 조명하는 포럼을 열었다. 30여년 동안 애국지사 김춘배의 활동을 조사했던 이승철 완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첫머리 발언을 통해 “김 애국지사가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가 (일본 경찰이 가지고 다니며 불었던) 호루라기 소리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엔 이렇게 의미있는 자리도 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앞으로 기념사업회 결성 등 김 애국지사를 조명하는 작업 제대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34년 5월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가 8년형을 마치고 만주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 의사의 형 고 김성배 목사, 김 의사, 김종수(당시 8살) 장로.
행사에서는 박병섭 박사(전북대)가 ‘삼례의 사상사 및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가계, 삼례 시절, 만주 이주’(유학 동학 의병 개신교 학교 등)를 발제했다. 또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가 ‘김춘배의 삶, 만주에서의 정의부군 활동과 함남권총의거’(신문자료를 중심으로)를 내용으로 발표했다.
24일 열린 행사에서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활약상을 보도한 당시 신문 등의 자료가 행사장에 놓여 있다. 박임근 기자
애국지사 김춘배는 1904년 전주군 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에서 김창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학교인 만주의 영신학교를 다녔고 1917년 일가 모두가 간도로 이주했다.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에 1927년가입했다. 연길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8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 출옥했다.
지난 24일 열린 행사에서 곽재우 목사가 노래 <선구자>를 부르고 있다. 박임근 기자
그해 10월3일 홀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를 공격해 총기 8정과 실탄 700발을 탈취했다. 2만여명이 동원된 일제 포위망을 피해 일본인 순사부장 등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활약했으나, 서울로 내려오다가 10월22일 붙잡혔다. 혼자서 주재소를 습격한 이 항일운동은 ‘함남권총사건’, ‘북청권총사건’ 등으로 불렸다. 그는 해방후 출옥했지만 1946년 12월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황수근 학예연구사는 “고인은 간도에서 정의부원으로 군자금 모집의 최전선에서 활동했고, 국내 항일운동으로 함경남도에서 단독으로 의거를 실행한 점은 1930년대 군자금 모금 활동의 대표 사례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김춘배를 조명하기 위해 24일 열린 행사의 포스터.
김 애국지사의 손자인 김경근 전주채움교회 목사는 “이 지역에서 조차 저의 조부를 기억해주는 분이 그동안 없었다. 그러나 조부의 독립운동을 제대로된 조명하기 위해 이승철 소장과 최재흔 전 민족문제연구소 전주지회장 등의 배려로 지난해 책을 냈고 기념사업회 결성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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