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김완봉의 어머니가 망월동 시립묘지에서 아들의 관을 앞에 두고 오열하고 있다.
그해 봄날 소년은 죽었다. 어머니를 찾으러 나간 금남로, 총성이 울리고 소년은 쓰러졌다.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된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무렵이었다. 총탄은 소년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광주 무등중 3학년생이던 소년의 이름은 김완봉(당시 15살)이다.
소년의 죽음은 33년이 지난 2013년 5월13일 한 극우 누리꾼에 의해 조롱당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이던 ㅇ(20)씨는 김완봉의 어머니가 아들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사진에 ‘아이고 우리 아들 택배왔다. 착불이요’라는 글을 붙여 올렸다. 관을 택배물로 조롱한 것이다. ㅇ씨는 2015년 9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모욕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5·18 역사 왜곡은 점차 더 심해지고, ‘현재형’이다. 백주의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제1야당 의원이 ‘5·18 폭동’이란 말을 버젓이 입에 올리고,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상에선 몇해 전 한 극우논객이 조작한 ‘5·18 북한군 개입설’이 사실인 양 확산된다. 5·18이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명명되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까지 열리게 됐을 때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사적·국가적 판단이 끝난 사안을 두고 왜 이런 억지 주장이 판을 치는가. 5·18 연구자 이재의 박사는 “학살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부 차원의 5·18 진상조사는 국회 청문회(1988), 검찰 수사(1995)와 재판(199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 등에서 여러차례 이뤄졌다. 하지만 발포 명령자 등 핵심적 사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5월20일 밤 광주역 첫 발포와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책임은 ‘자위권 발동’이란 논리로 ‘발포 명령’ 자체를 덮어 버린 상황이다. 발포 명령의 진실을 규명하려면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의 ‘수괴’인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공식 지휘체계를 제쳐두고 비공식 라인을 가동했는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일부 수구논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5·18이 ‘광주 북한 특수군’(이른바 광수) 600명이 투입돼 일으킨 폭동이라는 허위 주장을 버젓이 펼친다.
소년은 죽었지만, 그 누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전두환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 13가지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를 확정받았다. 그러나 전두환의 내란목적살인죄는 5월27일 발포 명령을 용인하며 시민 18명을 살해한 것에만 한정됐다. 민간인 희생자 165명 가운데 나머지 147명의 죽음은 ‘내란 중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폭동 와중에 발생한 희생자’로 법적 판단이 내려졌다. 총을 쏜 사람과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특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극우세력은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총으로 먼저 무장한 시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느라 희생자가 나왔다’는 등의 허위 주장을 퍼뜨렸다. 인터넷과 종편 등에서 ‘북한군 투입설’이 흘러나왔지만, 5·18 생존자들은 “반응하면 오히려 그들 논리에 말려든다”며 부러 외면했다. 하지만 익명성을 악용한 5·18 왜곡·폄훼는 집요했다. 급기야 내란 수괴 전두환은 2017년 <전두환 회고록>에 5·18을 ‘광주사태’로 표현하고 ‘북한군에 의한 폭동’이라고 서술하기에 이르렀다.
5·18에 대한 왜곡된 주장이 확산하자, 더욱 철저한 진상과 책임 규명을 위해 국회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5·18진상규명법)을 만들었다. 5·18진상규명법은 지난해 9월14일 시행에 들어갔지만,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구성조차 못 하고 있다. 조사위원 9명 가운데 자유한국당 몫을 제외한 6명의 추천은 지난해 이미 완료됐지만, 자유한국당은 위원 추천을 미루다 최근에야 3명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2명이 법적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해 청와대로부터 임명을 거부당했다.
이번에 불거진 ‘북한군 투입설’은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다. 애초 5·18단체와 민주당 등이 이 문제를 조사 대상에 포함하는 데 부정적이었던 것도 규명할 가치가 없는 명백한 허위 주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이 문제를 조사 범위에 포함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해 관철시켰다. 5·18단체에서도 북한군 투입설 등 허위 주장이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샅샅이 털고 가자는 의견이 많아졌다. 조사가 이뤄지면 지만원씨가 북한 특수군 투입 증거로 제시한 사진 가운데 보안사(기무사)의 미공개 사진이 포함된 경위 등도 밝혀야 한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들이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아직 유골을 찾지 못한 실종자들의 행방도 규명해야 한다. 5·18 유공자로 인정받은 행방불명자 83명 가운데 나중에 유전자검사 등을 통해 주검을 찾은 이는 6명에 불과하고 77명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2017년까지 5·18단체에 제보된 암매장 의혹 사안은 72건에 이른다.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은 “부상자나 연행·구금자의 신원을 추적할 경우 상당수의 행불자나 상이 후 사망자가 밝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암매장 의혹과 연계된 사안이다. 검찰은 광주 일원 12곳을 조사해 주남마을·송암동 등 4곳의 민간인 학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 진상규명조사위는 나머지 지점들에 대한 정밀조사를 벌여야 한다. 20사단 61연대 김아무개 대위와 3공수여단 김아무개 소령이 ‘헬기로 주검을 수송했다’고 한 검찰 진술 등 5·18 당시 계엄군 내부 제보를 확인해 암매장의 실마리를 풀 필요가 있다.
지난해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헬기사격 여부와 공군의 폭격작전 검토 여부,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역시 철저하게 진상을 가려야 한다. 성폭력의 경우 지난해 공동조사단이 성폭행 사실 17건을 뒤늦게 확인했지만, 이를 자행한 부대의 지휘관 등은 조사하지 못했다. 김정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장은 “국가 차원에서 5·18 진상규명에 다시 나서는 것은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를 바로잡아 국민 통합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규명위에선 반드시 ‘국가 차원의 5·18 공식 진상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의무이자 명령이며, 그해 봄 숨진 소년과 5월 원혼을 달랠 마지막 방법이다.
외아들 김완봉의 주검 앞에서 넋을 잃고 울던 어머니는 2003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진상규명을 위해 삭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아파요. 좀 아물려나 싶으면 지만원 같은 사람들이 상처를 헤집어놓습니다.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히 밝혀 왜곡과 거짓 주장이 발을 못 붙이게 해야죠.” 소년의 여동생 김문희(50)씨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번이 진상규명을 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마지막요.” 김씨가 ‘마지막’이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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