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전국일반

5·18 희생자 어머니, 태연한 전두환에 “저게 인간인가”

등록 2019-03-11 20:08수정 2019-03-12 07:32

5월 시민군·어머니가 본 전두환 재판
부상자동지회장 지낸 이지현씨
전남도청 최후 지킨 김태찬씨
아들 희생된 어머니 이근례씨
전씨 뻔뻔한 법정 태도에 분노
“학살자 보호해주는 나라 있나”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88)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 주변에 붙은 펼침막. 이지현씨 제공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88)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 주변에 붙은 펼침막. 이지현씨 제공
‘학살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11일 오후 2시29분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으로 들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에선 예상대로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전씨는 안경을 쓴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남편 전씨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추어올린 이순자(80)씨도 함께였다.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65)씨는 착잡한 심경으로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씨는 5·18 때 한쪽 눈을 잃었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때는 안대를 쓰고 나가, 공수부대한테 두들겨 맞았던 사실을 증언했다. 5·18 이후 그는 진상규명 투쟁에 나섰다가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 8일 재판 방청자로 뽑힌 뒤 ‘그놈이 온다’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는 “고통을 다시 대면하는 게 힘겹지만, 5·18 진실규명을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재판을 지켜볼 것”이라고 썼다.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으로 가는 길에서 ‘오월 어머니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안관옥 기자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으로 가는 길에서 ‘오월 어머니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안관옥 기자
재판정엔 긴장감이 흘렀다. 검사의 공소요지 낭독이 끝나자, 전씨 변호인은 “조비오 신부가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는 것은 모욕죄는 될 수 있어도 사자명예훼손의 사실 적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예상했던 바다. 이씨의 눈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헤드폰을 끼었다 뺐다 하며 부인 이씨와 대화를 나누는 전씨 모습이 들어왔다. 어떻게 광주의 법정에서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학살자의 뻔뻔함에 간신히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돌연 한 방청객이 “재판장께 한 말씀 해도 되겠는가? 변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는 곧 경위에게 제지당했다.

전씨 부부는 줄곧 시선을 재판석 쪽에 고정했다. 당당한 척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광주시민과 눈이 마주치는 게 두려운 것이라고 이씨는 짐작했다. 공판을 마무리하며 판사는 “앞으로 재판을 집중 심리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다음 공판은 4월8일 오후 2시로 잡혔다. 전씨 부부가 변호인과 귓속말로 무언가를 상의했다. 재판 시기와 절차의 유불리를 따져보는 것 같았다.

오후 3시45분 재판이 끝났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전두환, 이 살인마, 사과하고 가”라고 외쳤다. ‘학살자’는 눈을 몇차례 끔벅이다가 부인 이씨와 함께 퇴정했다.

전씨가 광주지법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5·18 시민군 김태찬(58)씨도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순간 김씨의 머릿속엔 1980년 5월27일 그 마지막 새벽, 옆에서 총을 맞고 숨진 친구 모습이 어른거렸다. 기동타격대 7조 조장이었던 김씨는 그날 도청 본관 2층에서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낯바닥만 봤어요. 뭔 말이 필요하겄습니까? 찢어죽이고 싶지요. 학살자를 이렇게 보호해주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김씨의 말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오월 어머니’ 이근례(82·광주시 남구 월산동)씨는 전씨가 서울을 출발했다는 뉴스를 본 뒤 광주지법 앞길에 나와 ‘그놈’을 기다렸다. 서둘러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그놈’의 모습에 이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씨의 아들 권호영(1962년생)은 그해 5월26일 집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뒤 실종됐다. 아들은 2001년 10월 무명열사 11명이 묻힌 망월동 묘역에서 발견됐다. 행방불명자 가족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21년 만에 주검을 수습한 것이다. 이씨는 “한달 넘도록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다가 ‘그놈’ 재판을 보려고 광주로 내려왔다”고 했다.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씨.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씨.
오후 4시15분 전씨가 법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차에 탄 그를 5·18 단체 회원 일부와 시민들이 막아섰고, 곳곳에서 “살인마”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들의 행동이 5·18을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걱정에 그 이상의 행동을 자제하는 듯했다. 16분 남짓 인파에 갇혔던 전씨의 승용차가 법원 사거리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이근례씨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저것이 인간이다요? 여그까지 와서 사과 한마디 안 하고….”

광주/정대하 안관옥 기자 daeha@hani.co.kr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 주변에서 시민들이 전씨의 사과를 촉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있다.
11일 오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의 첫 재판이 열린 광주지법 주변에서 시민들이 전씨의 사과를 촉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1.

대전 초등생 살해 교사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2.

HDC신라면세점 대표가 롤렉스 밀반입하다 걸려…법정구속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3.

“하늘여행 떠난 하늘아 행복하렴”…교문 앞에 쌓인 작별 편지들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4.

대전 초교서 8살 학생 흉기에 숨져…40대 교사 “내가 그랬다”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5.

살해 교사 “마지막 하교하는 아이 유인…누구든 같이 죽을 생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