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김정희 자매가 3일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지석에 있는 오빠의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무슨 잘못해신지 고자 안 보냄신게.”(무슨 잘못 했는지 지금도 안 보내고 있어요.)
김인후(83)·김정희(80)씨 자매는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지석’ 가운데 오빠(김전중·당시 20)의 비석 앞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정희씨가 “오빠가 아직도 안 온다”고 말하자 인후씨는 “어떵 오느냐게”(어떻게 오느냐)라며 손수건을 눈가로 가지고 갔다. 하귀초등학교 교사였던 오빠는 1949년 어느 날 붙잡혀 육지 형무소로 간 뒤 6·25전쟁이 터진 뒤 행방불명됐다. 자매는 “시국 잘못 만나 잘난 형제들 다 죽었다. 아이들 가르친 죄밖에 없는데 죽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제71주년 제주4·3 추념식이 열린 이날 제주시 4·3평화공원의 행방불명인 표지석과 각명비(이름 새긴 비), 위패봉안소에는 유족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4·3 때 아들을 잃었다는 이성선(91·제주시 한경면 낙천리) 할머니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고 했다. 해마다 시아버지의 표지석을 찾는 현유자(83)씨와 동서 이순녀(75)씨는 “살아질 때까지는 오겠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오겠다”고 했다.
각명비 앞에서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찾는 유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4·3 당시 희생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리움은 마찬가지다. 이미화(72)씨는 “평화공원 바로 위에 있는 절물휴양림에 운동 삼아 올 때마다 각명비에 들러 아버지 이름을 보고 간다”고 했다. 조천읍 함덕리에서 온 한옥석(86)씨는 1948년 12월21일 국군 9연대가 어머니를 끌고 가 앞 밭에서 총살한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했다.
제주4·3 유족들이 제주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김아무개(82)씨는 “국방부가 사과한다고 하니 대통령이 잘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이미 사과했기 때문에 국방부의 사과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며 “그런데 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과를 하나. 당연히 제주4·3 추념식장에 와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앞에서 유족들이 참배하고 있다.
제주4·3 당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경찰에 희생된 김낭규(80)씨는 각명비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눈물을 다 모았으면 한강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4·3 때 역시 희생된 아버지의 위패는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철회되는 아픔도 겪었다. 김씨는 나지막이 어릴 때부터 마음에서 우러나 불렀다는 노래를 불렀다. “온달 같은 우리 어머니/ 반달 같은 나를 버리고/ 저승길이 얼마나 좋아서/ 한번 가면 영 안 오나요.”
제주4·3 유족과 도민들이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서 분향·헌화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온 남편 송태휘(86)씨는 “군인들은 19살 중학교 2학년이던 형을 제주시내 냇가에서 주민들과 함께 목과 다리를 묶고 총을 쏜 뒤 기름을 뿌려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형체를 분간하지 못해 타다 남은 옷과 구두 조각으로 형을 찾았다”고 말했다. 송씨는 “국방부의 사과는 늦었지만 다행이다. 하지만 사과를 하려면 추념식장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날 추도사에서 “문재인 정부는 4·3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역사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제주도민들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4·3의 진실을 채우고, 명예를 회복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3세대가 4·3을 공유한다는 뜻에서 4·3 경험자 김연옥(79)씨의 손녀인 정향신(22·제주대 3)씨는 굴곡진 가족사를 낭송해 유족과 도민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4·3 때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군과 경찰은 이날 처음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추모제’에 경찰 수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해 헌화했다. 민 청장은 방명록에 “4·3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모든 분의 영전에 머리 숙여 애도의 뜻을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고 썼다. 국방부도 입장문을 내어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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