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농사 끝에 수확을 앞둔 기분이랑게.”
전남 해남군의 농민 정거섭(54)씨가 29일, 사흘 앞으로 다가온 ‘농민수당’ 신청을 앞두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씨를 비롯한 해남군 주민들은 지난해 6·13 지방선거 뒤 군수의 공약인 농민수당 조례를 제정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군은 오는 6월부터 1만5천가구의 농가 1곳당 연 60만원의 농민수당을 지급한다. 이는 전국에서 처음이다. 물론, 한달 5만원으로 생활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농민들도 잘 안다. 하지만 농민수당이 갖는 ‘의미’는 이들에게 각별하다. 정씨는 “농민수당으로 소득이나 생활이 나아지긴 어렵겠지만, 농업과 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사회가 보상한다는 측면에서 식량 생산자로서의 자부심을 농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농민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정책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6년 경기도 성남시와 서울시가 각각 청년배당과 청년수당 정책을 시행하면서 불을 지핀 지방정부의 기본소득 실험이 3년을 맞아 다양한 형태로 진화 중이다.
강원도에서는 올해부터 태어나는 아동은 4년 동안 월 30만원씩의 ‘육아기본수당’을 받게 된다. 지방정부가 육아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보건복지부)가 지급하는 아동수당(월 10만원)과 가정양육수당(나이에 따라 월 10만~20만원)까지 더하면 최대 월 6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 셈이다.
경기도에서는 지난 9일부터 ‘청년기본소득’(청년배당)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살 청년은 소득, 직업 등과 관계없이 분기별로 25만원씩 연간 100만원을 지역화폐로 받을 수 있게 됐다. 경남 고성군에선 13~18살 청소년에게 다달이 10만원씩 전자바우처 형태로 ‘청소년 수당’(꿈페어)을 지급하는 중이고, 경기도 부천과 안산에서는 예술인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특히 농민수당을 도입했거나 도입을 검토 중인 지역이 크게 늘었다. 29일 전국농민회총연맹과 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이 집계한 자료를 종합하면, 이른바 농민수당을 도입했거나 도입을 추진 중인 지방정부는 모두 54곳이다. 전남, 전북, 강원 등 광역지방정부 9곳과 전남 강진·해남, 경북 봉화, 충남 부여 등 기초지방정부 45곳이다. 지금의 농사직불금 제도는 농사 면적에 따라 지급해 땅을 많이 가진 이는 많이 받아가는 등 농촌 내 불평등과 불균형을 키울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많은 지역에서 기본소득의 일종인 농민수당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박경철 책임연구원은 “무분별한 자유무역으로 농업·농촌의 기반이 무너지고 농민의 삶 자체가 존속하기 어려운 만큼, 농민 기본소득이나 농민수당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국 35곳의 지방정부도 기본소득 시행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이날 경기 수원컨벤션센터에서 개막한 ‘2019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이재명 경기지사는 염태영 수원시장 등 도내 30개 지방자치단체 단체장과 백두현 경남 고성군수, 박정현 충남 부여군수, 정토진 전북 고창 부군수 등 35곳의 자치단체장과 함께 ‘기본소득 지방정부협의회’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기본소득 도입에 대한 전국민적 공감대 확산과 기본소득 기본법 제정,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소득이나 재산 등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지 않고 조건 없이 지급하기 때문에 ‘왜 부자까지 지원하느냐’는 식의 반발이 관련 논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본소득을 국민 모두의 권리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인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많은 선진국이 이미 ‘학생수당’ 등 보편수당을 지급하고 있다”며 “가난한 이들만 선별적으로 돕는 형태의 기본복지제도는 적은 예산으로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개념이라면 기본소득은 토지 환경 등 사회의 공유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균등하게 나눠 갖는 국민 모두의 권리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원 마련도 걸림돌이다. 경기도가 기본소득의 취지에 맞게 청년기본소득을 확대해 경기도민에게 1인당 연간 100만원씩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한해 13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경기도의 한해 예산은 20조원이다. 이재명 경기지사를 비롯해 국내 기본소득 학자들이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다. 국토보유세는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 면적에 따라 보유세를 일괄적으로 걷어 이를 다시 개인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제도다.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은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해서는 토지와 천연자원에서 재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의 불평등을 줄이면서 재원을 마련하는 정의로운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기본소득 논의가 확대되려면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알마즈 젤레케 뉴욕대 교수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것은 우리 세계의 소득 불평등을 해결할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라며 “기본소득은 부의 재분배 문제이며 특정 계층이 아닌 모두가 잘사는 길을 추구한다. 기본소득의 확대를 위해서는 부유세 등 부의 재분배가 필요한데 이것은 결국 중앙정부의 법제 개편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했다.
홍용덕 안관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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