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경기도 하남시 옛 주한미군 기지 캠프 콜번의 정문에 녹슨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다. 김기성 기자
“미군부대 때문에 담장도 제대로 못 고치고 평생을 살았는데, 정부 땅 되고 20년이 지나도록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지난 7일 오전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의 옛 미군기지 ‘캠프 콜번’ 주변 골목에서 만난 80대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두들겨가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낡은 단독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풍경은 시간을 5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기와 대신 슬레이트를 얹은 집들 사이에 시멘트를 덧바른 골목 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그는 “아직도 그린벨트로 다 묶여 있다. 죽기 전에 번듯한 집에서 발 뻗고 자기는 틀린 것 같다”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주택가를 지나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서자 대형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주한미군 반환공여구역’이라고 쓴 글씨 위로 하남시내 전경 사진이 붙어 있었지만, 절반은 찢겨 나간 상태였다. 바로 아래 기지 정문으로 사용되던 녹슨 철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면적이 30만7천㎡의 이 터는 2007년 4월에 반환됐다. 이후 하남시는 10년 넘게 대학 캠퍼스 유치와 교육·연구단지 조성을 추진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하남시는 최근 이 지역에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은 말 그대로 ‘계획 단계’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옛 미군기지 ‘게리오웬’ 앞에 주한미군 기지를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빛바랜 펼침막이 내걸려 있다. 이승욱 기자
지난달 20일 찾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의 옛 미군기지 ‘게리오웬’도 마찬가지였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는 ‘반환받은 미군기지 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란 내용의 빛바랜 펼침막만 달랑 걸려 있었다. 이곳과 다리 하나를 두고 이어진 문산읍 선유리 마을도 고요하기만 했다. 마을 어귀에 부동산중개업소와 재개발조합 사무실이 있었지만, 인적 끊긴 문에는 먼지만 가득했다. 반환된 기지들이 오랜 기간 방치되면서 마을 주민들도 이곳을 떠난 것이다.
근처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충현(68)씨는 “미군기지가 있을 때만 해도 활기가 넘쳤다”며 “미군이 떠나고 개발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마을이 쇠퇴했다”고 말했다. 주민 김아무개(80)씨도 “미군이 떠나고 노인과 빈민만 남았다.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마을은 사라질 것”이라며 하늘을 바라봤다.
‘공여구역’은 우리 정부가 주한미군이 사용하라고 미국 정부에 제공한 땅이다. 이런 공여구역은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으로 연차적 반환이 이뤄지고 있다. 반환 대상 미군기지의 96%인 173㎢는 경기도에 있다. 이 가운데 83.8%인 145㎢(29곳)가 접경지역인 경기 북부에 집중돼 있다.
경기도 내 반환공여구역 중 개발 가능한 구역은 동두천 6곳, 의정부 8곳, 파주 6곳, 하남 1곳, 화성 1곳 등 5개 시 22곳(72.371㎢)이다. 대부분 2007년 이후 반환됐다. 반환 초기만 해도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은 미군기지 터에 기업과 대학이 들어오게 하면 지역경제가 활력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개발 가능한 22곳의 반환공여구역 가운데 올해 5월 말 현재 개발이 끝난 곳은 경기 북부 광역행정타운이 들어선 의정부 ‘캠프 시어즈’ 단 한곳뿐이다. 8곳은 공사 중이지만, 9곳은 언제 시행될지 모를 사업계획만 나와 있을 뿐이다.
특히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어 주한미군 의존도가 높았던 동두천시의 경우, 개발 가능한 반환공여구역 6곳 가운데 캠프 모빌, 케이시, 호비 3곳은 반환조차 불투명하다. 이 때문에 박형덕 동두천시장은 지난달 말 이종섭 국방부 장관을 만나 “정부가 2020년께 캠프 케이시와 호비를 반환하기로 했으나 국방부는 현재까지 명확한 이전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소규모 병력이 시 한복판에 있어 발전에 막대한 장애가 되고 있으니 옮겨가게 힘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옛 주한미군 기지 ‘게리오웬’에서 인근 마을로 연결되는 다리의 모습. 이승욱 기자
경기지역의 미2사단 반환기지는 미군기지들의 평택 이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국방부)가 매각하기로 돼 있었다. 이 때문에 땅값도 상대적으로 비쌌다. 게다가 주변 기반시설도 턱없이 부족해 대학이나 기업 유치는 물론이고,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지자체들도 대부분 재정이 취약해 자체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소성규 대진대 공공인재법학과 교수는 “개발을 하려면 지자체가 국방부에서 땅을 사들여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중앙정부 지원 없이는 개발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연구원이 2018년 펴낸 ‘미군 반환공여지 국가주도 개발에 따른 경기도 대응방안’이란 연구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은 연방재산국(BiMA)이, 필리핀은 대통령 직속 기지전환개발청(BCDA)이 반환미군기지의 개발을 주도한다. 장윤배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국가주도 반환공여지 개발을 위해 반환공여지 및 주변 지역의 개발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전담 조직으로 개발청과 전담 개발공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이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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