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통감관저 터가 있던 서울 중구 기억의 터 앞에 국권 상실 역사를 담은 ‘국치길’을 표시하는 기역(ㄱ)자 로고의 보도블록이 설치돼 있다. 서울시는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글 자음 기역 모양의 로고를 국치길 보도블록 곳곳에 설치했다. 시민들이 발걸음을 옮기며 이 로고를 보는 것 자체로 과거 치욕을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서울 남산은 일제 침탈의 아픔이 깃든 곳이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1925년 메이지 일왕과 자신들의 건국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신사인 ‘조선신궁’을 남산에 세웠다. 이에 앞선 1906년 조선 병탄의 초석을 닦은 ‘통감부’(나중의 총독부)가 세워진 곳도,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조성된 곳도 남산 자락이었다. 그 치욕이 스민 공간이 ‘기억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시는 한일병탄조약이 공포된 국치일인 29일 남산 예장자락에 약 1.7㎞에 이르는 ‘국치길’ 조성을 마치고 공개한다고 28일 밝혔다. 국치길 코스는 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의 하나로, 남산 역사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조성됐다. 이 길은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한다. 1906년 설치된 통감관저는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 통감과 총독의 관저로 쓰였다. 1910년 8월22일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길을 따라가다 만날 수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 터였다. 통감부는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으며, 1921년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 안의 새 청사로 옮겨졌으며, 남산에 있던 통감부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국치길이 조성된 남산 기억의 터~조선신궁 터.
이곳을 지나면 일제의 군신으로 추앙받는 러일전쟁 영웅 노기 마레스케를 추모하기 위한 ‘노기신사’ 터와,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뒤 일제가 세운 ‘갑오역(갑오전쟁)기념비’ 터, ‘경성신사 터’가 이어진다. 갑오역기념비 터와 경성신사 터에는 현재 숭의여대가 자리잡았다. 길은 남산식물원이 있던 자리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은 일제가 1925년 조성해 식민지 정부의 국가의례를 집전하고, 한국인들을 강제로 참배하게 한 ‘조선신궁’ 터이기도 하다. 길 마지막에는 지난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에 서울시가 설치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조성돼 있다. 시는 국치길 보도블록에 ‘길’을 형상화하고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기역(ㄱ) 모양의 로고를 새겨넣었으며, 국치길의 각 역사 현장에 ‘ㄱ’ 모양의 안내판을 설치했다.
서울 남산에 일제가 지은 한국통감부와 현재의 모습.
서울 남산에 일제가 지은 조선신궁과 현재의 모습.
국치일인 29일에는 무장 항일 투쟁을 이끈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위원장과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 김용만씨, 조소앙 선생의 손자 조인래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이 길을 직접 걸을 계획이다.
한편, 29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하는 경술국치일 추념식이 열린다. ‘국치일을 아십니까?’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비롯해 오케스트라와 성악가의 ‘국치가’ ‘국치일의 노래’ 등의 공연이 이어진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