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토사가 수북이 쌓여 있다.
비무장지대는 육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원도 고성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한반도 동서를 가르는 248㎞ 길이의 비무장지대(DMZ)가 끝나면 서해 쪽으로 물길을 따라 ‘해상 비무장지대’가 이어진다.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 임진강 하구에서 강화군 볼음도(말도)까지 67㎞에 이르는 ‘해상 디엠제트’인 한강하구는 육상 비무장지대와 달리 군사분계선(MDL)이 존재하지 않는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쌍방은 한강하구를 중립수역으로 설정하고 민간 선박의 항행을 개방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방부와 유엔군사령부는 지난 66년 동안 중립수역의 뱃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남과 북은 배가 드나들어야 할 포구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육상 비무장지대처럼 강변을 중무장지대로 바꿔놨다. 한때 번성했던 옛 포구들은 사라졌고 주변 마을들은 민간인 통제구역(민통선)으로 묶였다.
남북은 지난해 9·19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한강하구를 ‘공동이용수역’으로 설정하고 선박 항행을 위한 공동 수로조사와 해도 작성까지 마쳤지만 북-미 관계가 꼬이면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임한리 들녘 모습.
■ 파주~김포~강화 잇는 67㎞ 해상 국경선 파주 임진강 하구에서 김포 조강, 강화 볼음도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67㎞ 길이의 한강하구에는 3개 전망대가 조성돼 강 건너 북한 마을과 주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난 16일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남북의 가을 풍경은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철새 도래지답게 기러기 떼가 철책선 위를 쉴 새 없이 넘나들었고, 북쪽으로 2㎞가량 떨어진 황해북도 개풍군 임한리 들녘에는 주민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게를 진 농부와 풀을 뜯는 소, 자전거 타는 주민 등 정겨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날씨가 맑아 김일성사적관, 탈곡장, 소학교 등 시설물도 훤히 내다보였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솟은 오두산(118m)은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유역 패권을 두고 대치했던 전략적 요충지다.
오두산 전망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조강이다. 조강(祖江)은 400㎞를 흘러온 한강물이 민물의 생을 다하고 늙었다는 의미와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강이라는 뜻에서 김포에서 부르는 한강하구의 옛 이름이다.
조강을 따라 들어선 민통선 마을인 김포시 하성면 시암리 철책길을 지나면 해발 155m의 애기봉을 만난다. 애기봉전망대는 한 종교단체가 등탑에 불을 밝히고 보수단체가 대북전단을 뿌려 북과 심각하게 갈등을 빚었던 곳이다. 2014년 전망대가 철거되고 현재 평화생태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애기봉 건너편은 북한 개풍군 암실마을이다.
경기도 김포시 애기봉전망대에서 바라본 조강 물줄기와 강 건너편 북한 개풍군 모습.
애기봉에서 강화 방향으로는 조강리와 용강리, 보구곶리 등 강변마을이 이어진다. 조강포구는 분단 전에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물류의 집산지이자 서해안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다. 강 건너에는 같은 이름의 북한 개풍군 조강리가, 강 안에는 1996년 임진강에서 떠내려온 북한 소가 잠시 머물렀던 작은 섬 유도가 있다. 김포시는 남북 조강리에 통일경제특구를 조성하고 유도를 매입해 ‘평화의 섬’으로 가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조강에는 조강포구 말고도 개성의 관문이었던 강령포구와 마근포 등 사라진 옛 포구들이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경기연구원 김동성 박사는 “옛 포구 복원과 포구 마을 정비는 남북한 정세 변화에 영향을 적게 받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했다.
강화 북단 철산리에는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뜻을 가진 제적봉(制赤峰) 정상에 강화 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북한과 1.8㎞ 떨어진 이곳에서는 망원경 없이도 연백평야가 펼쳐진 들녘과 당두포리, 율동리, 탄동, 유정동 등 20여개 마을을 볼 수 있다.
한강하구는 강화 북단에서 예성강을 만나 교동도와 저어새 서식지인 볼음도, ‘막내섬’ 말도를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경기도 김포시 한강하구에 설치된 철책선 너머로 쇠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있다.
■ 답보 상태에 빠진 한강하구 뱃길 열기 한강하구는 정전협정 1조 5항에 따라 남북의 민간 선박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중립지역에서 군사 충돌이 이어지면서 강기슭이 군부대의 통제에 들어가 선박 항행이 제한돼왔다.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1990년 홍수로 유실된 한강 제방 복구를 위해 남쪽의 준설선이 처음 통과했으며, 1997년 유도의 황소 구출, 2005년 서울~통영 거북선 이동 등 극히 제한적으로 항행이 허용됐다.
남북은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한강하구 활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전면 중단됐다.
남과 북은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한강하구 공동이용을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을 강구하기로 하면서 한강하구 활용에 대해 다시 불을 지폈다. 남북은 곧바로 공동조사단을 꾸려 11월5일~12월9일 강화도 말도~파주시 만우리 구역(길이 70㎞, 면적 280㎢)에서 공동수로조사를 진행하고, 공동이용수역의 수심, 해안선, 암초 위치 등이 표기된 해도를 작성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올해 4월부터 민간 선박 시범항행이 시작됐어야 했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답보 상태에 빠졌다.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들이 인천시 강화군 볼음도 갯벌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한강하구 뱃길을 염원해온 김포시와 시민단체는 지난 4월 전류리에서 배 10척을 띄워 어로한계선을 넘어 중립수역 앞까지 항행을 하며 남북 당국에 ‘한강하구 물길 열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지난해 7월에도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해 고양 행주나루, 신곡수중보, 전류리를 거쳐 어로한계선까지 35㎞를 항행한 바 있다.
전문가들도 한강하구 뱃길이 현재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유엔 제재 아래서도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 마중물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태호 전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지난달 19일 경기도 주최로 열린 디엠제트 포럼에서 “한강하구는 정전협정상 자유항행이 보장된 중립수역이므로 서해 엔엘엘(NLL·북방한계선)과 달리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에 휩쓸리지 않고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남북 공유하천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며 “한강하구 뱃길은 한강에 갇혀 있는 김포시는 물론이고 파주, 고양시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한강경제론’을 실현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천시 강화군 철산리 제적봉에 설치된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풍경.
■ ‘남북교류의 최적지’ 개발이냐 보전이냐 역사적으로 수운과 물류, 어업의 중심지였던 한강하구는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최적지로 꼽힌다. 실제로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간 선박 항행 말고도 장단반도와 강화 교동도 평화특구, 김포 조강특구, 문산~도라산 고속도로, 디엠제트 평화둘레길 등 각종 개발사업이 남북협력사업이란 이름으로 검토되거나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한강하구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기수역 생태계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하고 생태적으로 우수한 습지와 자연경관을 유지하고 있어 보전의 필요성도 높다. 이에 환경부는 여의도 면적의 약 20배에 이르는 한강하구 습지 60.7㎢를 2006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경기도 김포시 한강하구에서 천연기념물 325호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개리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 김진한 박사는 “한강하구 지역은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를 비롯해 매, 흰꼬리수리, 검독수리, 재두루미, 개리, 큰기러기, 금개구리, 삵, 매화마름 등 희귀생물이 다수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아직 수생태계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어 알려지지 않은 미기록종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강하구에 인접한 경기 파주, 고양, 인천 지역 환경단체들은 무분별한 개발에 앞서 한강하구 수역 보전을 위한 생태자원조사와 습지보호지역 확대 지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노현기 파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은 “한강하구 수역과 관련한 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두가 개발 담론뿐이라는 것”이라며 “70년 동안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한강하구 중립수역 보전을 위해 습지보호지역 확대 등 정부의 선제적인 조처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글·사진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한강하구 중립수역의 서쪽 끝 지점인 인천시 강화군 볼음도 해변에 출입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