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도시 빈민들이 지금의 성남시에서 생존 대책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광주대단지 사건’이고 있다. 당시 수만 명의 주민이 거리로 나와 군사정권의 개발독재에 항거하며 경찰서와 관공서 등을 불태웠다. 이후 급성장한 성남시는 그 폐허 속에서 생겨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 시절 도시 빈민들이 개발독재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벌인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민간차원에서 정식 모임이 발족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대단지’는 1968년 서울시장이던 김현옥씨가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해 서울 근교(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로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킨다는 생각에서 추진됐다. 당시 서울시는 재원 조달과 철거민 생업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평당 400원에 경기도 땅을 사들여 개발한 뒤, 오른 땅값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등의 무리한 방식으로 서울 위성도시를 완성하려 했으나, 투기 바람까지 일어 철거민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수도·전기·도로·화장실 등은 물론 생계수단조차 없었던 주민들은 당시 광주군 성남출장소를 습격하고 차량을 탈취하는 등 광주대단지 일원은 6시간 동안 무정부 상태가 됐다. 주민 22명이 구속돼 20명이 처벌을 받았다. 당시 언론은 비참한 처지의 철거민 목소리를 외면하고 ‘빗속의 난동 6시간’ 등으로 보도했다.
이에 지난 10일 출범한 ‘8·10광주대단지사건 기념사업회’는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문화·학술사업, 사료 발굴 등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사업회장으로 선출된 김준기(전 신구대 교수) 성남지역발전연구소장은 “이 사건은 명백한 시민항쟁이었다. 앞으로 정기적인 기념사업으로 시민의 역량 강화, 긍정적 평가 등을 끌어내 올바른 성남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광주대단지로 불렸던 곳은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됐으며, 1990년대 초 분당 새도시가 들어서면서 현재 인구 10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가 됐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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