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가 조금 일찍 찾아왔다.
충북 청주시는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90대 할아버지가 현금 1억원을 기부했다고 25일 밝혔다. 갈색 점퍼에 지팡이를 짚은 단아한 노인은 지난 22일 오후 3시께 청주시 내덕동 청주시청 임시청사 2층 복지정책과를 찾아 흰색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1억원인데 기부하고 싶어요.”
이 말을 들은 우정수 청주시 복지정책과 희망복지팀 주무관은 귀를 의심했다. 우 주무관이 다가가자 이 노인은 “평소 방송 등에서 기형 등 중증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작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우 주무관이 행정기관인 청주시에선 현금을 받을 수 없고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입금해야 한다는 뜻을 알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 주무관은 노인의 팔을 잡고 이웃 건물 청주시금고(농협)로 향했다. 노인은 걸음이 약간 불편했다. 우 주무관은 10분 남짓 걸으며 이름, 나이 등을 물었지만 노인은 “90살 한창 넘었어요. 다른 것은 묻지 마세요. 알리고 싶어서 하는 일 아니니까요”라고 말문을 막았다.
우 주무관과 노인은 농협 계좌를 통해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입금했다. 우 주무관은 “할아버지 자식이나, 사모님께서 뭐라 하지 않으실까요”라고 말을 건네자, 노인은 “허허. 다행히 자식들도 잘 자라 자리를 잡았으니 서운하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요”라고 했다. 입금 뒤 노인은 장애인 등이 이용하는 승합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고, 우 주무관은 차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 주무관은 “워낙 경황이 없어 사진 한장 남기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꾼듯한 시간이었다. 어르신의 뜻에 따라 장애인 등을 위해 소중하게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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