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김흥배 선생의 청주농업학교 학적부. 학적부 아래 ‘김현구 차남’이란 기록이 눈에 띈다. 당시 청주농업고 만세 거사 관련 학생들의 재판 기록에 ‘김현구의 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학생 만세 거사 모의가 이뤄졌다. 3·1독립만세 10주년 기념행사위원회 제공
‘청주농업학교 학생 만세 거사’를 모의했던 장소를 찾았다. 3·1만세 운동 104년 만에 청주지역 학생 만세 운동의 비밀이 풀렸다.
광복회 충북지부·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등이 꾸린 3·1독립만세 10주년 기념행사위원회(3·1행사위)는 1919년 3월9일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고) 학생들이 만세 운동 관련 문서를 만들고, 태극기를 그리는 등 거사를 모의한 곳은 지금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 19번지’라고 28일 밝혔다. 현재 이곳에는 주택·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104년 전 ‘김현구의 방’. 지금 청주시 상당구 남주동 19번지인 이곳은 상점·주택 등이 들어섰다. 오윤주 기자
3·1행사위는 당시 일제에 체포된 거사 가담 학생 등의 재판 기록, 학적부 등을 샅샅이 살펴 거사 모의 장소를 특정했다. 당시 공주지법 청주지청의 재판 기록을 보면, “1919년 3월9일 경성중 신영호(18)가 수원에서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문서를 청주농업학교 오석영(18) 등에게 건네며 청주에서 만세 운동을 선동하자, 오석영 등이 ‘청주군 청주면 청수정 김현구의 방’에서 등사판을 이용해 300매를 인쇄했다”고 돼 있다. 당시 거사 모의 학생들은 모두 체포돼, 재판에서 신영호·오석영 등 학생 9명이 투옥되고, 17명이 퇴학 조처됐다.
3·1행사위는 수년 동안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만세 거사 행적을 추적했지만, ‘김현구의 방’ 위치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청주농고의 도움을 받아 당시 만세 거사에 참여하려던 학생들의 학적 기록을 살피는 과정에서 ‘김현구’를 찾아냈다. 1919년 당시 청주농업학교 학적부 25쪽에 ‘김흥배 김현구 2남’이라고 기록돼 있다. 김흥배는 1901년 8월15일생으로 청주농업학교 만세 거사 당시 1학년이었다. 그는 만세 거사 적극 가담자로 몰려 퇴학 조처됐다.
정지성 3·1행사위 공동 대표가 104년 전 ‘김현구의 방’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오윤주 기자
정지성 3·1행사위 공동 대표는 “애초 ‘김현구’를 학생으로 보고 당시 청주농업학교 전교생의 학적부 등을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최근 다시 낱낱이 살피는 과정에서 김현구·김흥배 부자를 찾았고, 그들의 주소가 옛 청주군 청주면 청주정이라는 것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당시 이들 부자의 집과 200m 남짓한 곳에 제일교회 부속 청남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 의열단 부단장을 지낸 곽재기 선생과 독립운동가 김태희 선생이 교사로 있었다.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청주농업학교의 만세 거사를 도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현구·김흥배 부자는 모두 숨졌으며, 당시 거사 장소는 지금 주택·상점 등이 들어서 있다. 정 대표는 “당시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의 만세 거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됐지만, 당시 학생들의 거사 모의 소식은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만세 거사를 촉발했다”며 “청주 농업학교 학생 만세 거사는 역사적 사건이다. 시민과 뜻을 모아 만세 거사 장소에 표지석을 세우고, 유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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