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가 최근 전주 인문학 연구실에서 대형 붓글씨 서법을 설명하고 있다. 박임근 기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천년고도” 전주의 정체성을 보여주려고 대형 붓글씨를 직접 썼습니다. 영화제 개막 때라도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서예를 보여줘 전주의 색깔을 알리고 싶었어요.”
오는 28일부터 열리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홍보 영상에 참여해 대형 붓글씨 퍼포먼스를 진행한 김병기(68) 전북대 명예교수의 뜻이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10년간 맡았던 그는 지난 12일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누각에서 ‘영화는 계속된다. 전주국제영화제’ 14글자를 한글 흘림체(행서)로 썼다. 서예의 기본인 한자의 기본 필획을 사용했다. 페트병 2ℓ(리터)짜리 분량의 먹물이 들었다. 그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 그와 동시대의 전주 출신 명필 창암 이삼만의 서체를 합친 글꼴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쓴 글씨는 개막식 때 행사장 천정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로도 소개될 예정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는 “전통문화·예술의 고장 전주를 드러내기 위해 대표 전통문화 중 하나인 서예를 통해 영화제 슬로건을 붓글씨로 표현했다. 코로나19로 2년 넘게 힘들었던 국민들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12일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누각에서 ‘영화는 계속된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대형 붓으로 쓰고 있다. 김병기 교수 제공
서예의 외연 확산을 꿈꿔왔던 그는 2008년 10월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한벽극장에서 서예와 무대공연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서예를 미술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붓끝의 움직임이 무용·음악처럼 동적이라고 표현했다. 예컨대 한 번 쓴 글씨는 개칠(덧칠)을 할 수 없는 일회성으로, 춤동작과 노랫소리처럼 이미 지나가면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형 붓글씨를 쓸 때는 자세가 중요해요. 어깨 넓이 두 배 간격으로 양발을 벌려 기마자세를 취한 채, 큰 붓을 주먹으로 꼿꼿이 세워 잡고 써야 합니다. 그래야 정통 서예의 예술성이 종이 속으로 파고들어 갑니다. 그냥 선 상태에서 봉걸레로 청소하듯이 쓰면 단지 종이에 먹칠을 할 뿐으로, 파격적인 행위예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서예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서예를 죽이는 셈입니다.”
체력 확보를 위해 태극권 몸동작을 매일 35분 이상 수련하는 그는 “서예는 코로나 시대에 딱 맞다. 차분히 명상하며 글씨를 쓰면 내적인 성찰과 수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본립도생’(근본이 서면 방법이 생긴다)이 좌우명인 그는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잔꾀를 부리지 말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로 6m가 넘는 ‘전북대학교’ 새 정문 현판도 그가 썼다. 지난해 2월 전북대 중문과를 정년퇴직한 그는 집 근처에 인문학 사무실을 열었다.
“인문학을 하면서 한자를 안 쓰는 것은 바보짓으로, 잃어버리는 게 너무 많습니다. 한자문화권인 우리는 한자를 배워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명품 양복이라도 와이셔츠·넥타이·구두 없이는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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