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광한루원 경내 안의 오작교와 광한루의 모습. 남원시 제공
1418년 충녕대군(뒤의 세종)의 왕세자 책봉에 반대하다 남원으로 유배된 황희는 1419년 자신의 선조인 황감평이 지은 서실을 헐어 누정을 세웠다. 이름이 ‘광통루’(廣通樓)였다. 그 뒤 세종 26년(1444년)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가 ‘광한루’(廣寒樓)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당시 정인지가 광통루에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달나라의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광한청허부는 `넓고 차갑고 맑고 빈 곳’이란 뜻이다.
광한루는 일본에 의해 두 차례 시련을 겪었다. 먼저 옛 건물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 1638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재건됐다. 또 일제 강점기엔 이 곳이 재판소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광한루에 ‘황군만세’라는 군국주의 선동 팻말도 붙어있었다고 한다.
조선 때 광한루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4대 누각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조선 후기엔 소설 <춘향전>과 판소리 <춘향가>의 소재와 배경이 돼 인기를 얻었다. 현재 광한루엔 `광한루’ 외에도 ‘호남제일루’, ‘계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는 호남에서 제일 가는 누각이라는 뜻이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궁전이란 뜻이다. 광한루는 보물 281호, 광한루원(광한루 일대의 정원)은 사적 303호로 지정돼 있다.
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광한루가 세워진 지 600년이 됐다. 환갑을 10번 맞은 셈이다. 남원시는 건립 600주년을 맞아 8월2일부터 10일까지 광한루원에서 다양한 기념 행사를 준비했다. 이환주 남원시장은 “광한루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춘향전은 남원을 사랑의 고을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광한루 600년을 계기로 남원에 새로운 희망을 담겠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서울 숭례문이나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큰 피해를 본 일이 있었다. 목조 건물인 광한루의 보존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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