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이백면 내기마을 뒷산에서 본 아스콘공장. 공장 안에 쌓여 있는 골재 뒤로 마을이 보인다.
“아마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으면, 3년 전 우리처럼 전북 익산 장점마을도 주변 공장이 주민 건강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학조사 결과를 소신껏 말하면 학자들도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지난 27일 전북 남원시 이백면 강기리 내기마을 회관에서 만난 이장 김중호(53)씨의 말에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14명의 암환자가 나온 남원의 내기마을도 3년 전 박근혜 정권 때가 아닌 지금 역학조사를 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얘기다. 그의 아버지는 5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내기마을 주민들의 고통은 1995년 마을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아스콘 공장이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농작물이 말라 죽었다. 그 뒤 암환자들이 속출했다. 익산 장점마을처럼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아스콘 공장을 의심했다. 아스콘을 만들 때 비산하는 실외 라돈 등이 원인으로 거론됐다.
참다못한 주민들은 2006년 5월, 환경부와 전북도청 등에 주민 생존권 보호를 위한 아스콘 공장 폐쇄(이전) 조치를 탄원했다. 2015년 1월부터 2016년 5월까지는 질병관리본부 주관의 암 역학조사도 이뤄졌다. 하지만 2016년 11월18일에 발표된 역학조사 결론은 장점마을과 달랐다. “조사 지역에서 발생한 폐암은 지역에서 추정된 다핵방향족화합물(PAHs)의 증가, 가구별 실내 라돈의 수준, 그리고 흡연력 등의 영향을 받았고, 이들 요인들 간의 상승작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됨.” 유해물질과의 인과관계는 입증되지 않았다. 지난 11월14일 환경부의 익산 장점마을 환경오염 및 주민 건강 실태조사 결과에 내기마을 사람들은 부러움과 함께 분통을 떠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장 김씨는 “저런 위해시설이 없을 때는 곰방대를 물고도 90~100살까지 살았다. 폐암 걸린 주민 2명 모두 담배를 안 피는 경우다. 역학조사 결론에서 개인 흡연력이 나오는데 이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말했다. 또 “공장 안에서 시료를 채취하지 않는 등 데이터를 제대로 뽑지 않았다. 무조건 덮으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잘못을 제대로 못 밝힌 역학조사가 오히려 책임을 면피시켜준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주민은 “저런 위해시설이 없을 때는 곰방대를 물고도 90~100살까지 살았다. 폐암 걸린 주민 2명 모두 담배를 안 피우는 경우다. 역학조사 결론에서 개인 흡연력이 나오는데 이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내기마을 이장 김중호씨가 아스콘과 골재 등을 다루는 마을 주변 공장을 가리키고 있다.
내기마을 조사에 참여한 김정수 환경안전건강연구소장은 “아스콘은 발암물질인 다핵방향족화합물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아스콘공장과 주민 쪽 영향의 상승작용으로 결론을 모호하게 냈다. 또 아스콘 공장의 쇄석하는 공정에서 실외라돈이 높게 나와서 주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이 반영이 안 됐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내기마을에 공장이 하나여서 잘 조사하면 암 발병 원인을 밝힐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제 환경부가 재조사를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주민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는 사이 남은 이들은 지쳐만 갔다. 수년 전 폐암으로 남편과 이별한 주민 형아무개(77)씨는 “방송에 인터뷰가 나오면 주변에서 연락이 온다. 좋은 일도 아니고 마을 이미지만 나빠진다며 싫어하고 우리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도 기피한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자식들도 명절에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만 고향을 떠나라’고 성화하는 통에 우리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전했다. 또다른 주민은 “옛날에는 개울가에서 꿀꺽꿀꺽 물을 마셨지만 이제는 그렇게 못한다. 공장의 돌가루 때문에 산소에 풀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북 남원시 이백면 내기마을의 회관에서 주민들이 역학 재조사 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오른쪽은 마을 이장 김중호씨. 주민들은 “심지어 자식들도 기피한다”며 얼굴 노출을 꺼렸다.
갑상선 암 때문에 10여년 전에 수술을 받은 이 마을 부녀회장 김연옥(76)씨는 “공장이 들어선 뒤 2000년대 초반 어느날 아침, 고사리를 뜯으러 밖으로 나갔다. 공장에서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생머리가 아팠다. 이런 냄새를 맡고 우리가 안전할까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위해물질 저감시설 등으로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해 하고 있다. 김씨는 “호르몬을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니까 매일 아침에 알약을 먹는다. 늘 피곤하고 힘들다”고 말했다. 수년 전 폐암으로 남편과 이별한 주민 형정자(77)씨는 “팔다리 등 전신이 아프다. 몇 년 전부터 머리가 자주 흔들려 고통스럽다”고 했다.
남원시는 1993년부터 2014년까지 발병자 수가 모두 17명(13명 사망)이라고 28일 밝혔다. 공장이 들어선 뒤인 1997년부터는 모두 14명이다. 시는 2015년부터 올해까지는 암 발병자가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지만 주민들은 시를 불신했다. 한 주민은 “남원시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며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녀회장 김씨는 “법적 문제를 따지기 전에, 어쨌든 우리 주민들이 암으로 많이 돌아가셨으니 남원시에서 고통스런 주민을 살펴야 한다. 장점마을은 공장 가동을 중지시켰다. 정치인들이 표가 필요한 선거때만 되면 찾아 온다”고 말했다.
내기마을 이장 김중호씨가 3년 전 모호한 결정이 난 역학조사 최종 결론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주민들은 제대로 원인을 밝히기 위해 환경부가 재조사하도록 주민 청원을 낼 예정이다. 남원시는 주민 청원이 들어오면 전북도와 협의해 환경부에 건의할 방침이다. 노인이 많은 이곳 주민들에게 갈 길은 험난해 보였다.
이장 김씨는 500년 이상 대대로 조상이 살아온 고향을 ‘이제 떠나야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 때문이다. 그는 “보건소에서 나와서 ‘담배 피면 건강에 안 좋아요. 물은 끓여서 드세요. 그리고 자주 창문을 환기하세요’ 등 이 따위 소릴 한다. 우리 마을에선 하나마나한 얘기다. 이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남원/박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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