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 도쿄 시나가와역에서 일본 기업의 사죄와 손해배상을 촉구하는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운동 ‘대모’로 불리는 이금주(99·전남 순천)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에게 정부가 10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이 회장을 대신해 손녀 김보나(51)씨가 훈장을 대리 수상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대신해 김홍철 광주인권사무소장이 11일 오전 11시 이 회장을 방문해 훈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 회장의 삶은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고통을 상징한다. 남편은 일제 해군 군무원으로 강제징용됐다. 8개월된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던 남편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저녁 기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1942년 11월, 결혼 2년만이었다. 이 회장은 “멀어져 가는 남편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남편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4월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충렬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달랑 종이 한 장 뿐이었다. 평안남도 출생의 실향민인 이 회장은 공직자이던 아버지를 따라 광주에 와 정착했다. 이 회장은 유치원 교사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홀로 아들을 키웠다. 남편을 잃은 고통은 일본에 대한 분노가 됐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유족회장은 1940년 10월10일 서울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88년 6월 사단법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출범에 힘을 보탰던 이 회장은 광주유족회장을 맡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하는 ‘광주천인소송’을 시작했다. 이어 우키시마마무 폭침사건 소송, 관부재판 소송, B·C급전범 소송,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을 주도했다.
이 회장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일본어로 꼼꼼하게 정리했다. 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는 “냉기가 흐르는 집 2층에서 피해자 서류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저렸다”고 말했다.
‘충렬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적힌 남편의 사망 통지서.
이 회장이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제기했던 7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모두 패소했다. 일본어가 유창하고 필체가 좋은 이 회장은 8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법정 증언을 했다.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은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지만 국내 손해배상 소송의 밀알이 됐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등은 2012년 10월 광주지법에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지난 해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 회장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면서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됐다.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숨진 그의 남편의 위패가 일제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 출신 군인·군속들을 합사에서 빼달라며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남편이 전사한 섬에 갔다가 어떤 흔적도 찾지 못하고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보관하고 있다.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유족회장이 광주광역시 남구 진월동 자택 2층에서 피해자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현재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다. 2012년 며느리와 아들이 몇개월 사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금주 회장님의 삶이 꼭 우리 민족의 수난 같아요. 근로정신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나선 것도 회장님의 삶을 보며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드리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20여 년 전 취재를 하다가 이 전 회장을 인터뷰했던 이국언 공동대표는 “내일 뵈면 국가가 주는 상을 알아보실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근로정신대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제공
일제에 강제징병 당해 유골도 찾지 못한 남편의 한을 품고,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