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장환봉씨의 재심 선고에 출석한 유족들 중 부인 진점순, 딸 장경자씨.
“아믄(암 그렇지), 무죄지 무죄야.”
여순사건 7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민간인 희생자 장환봉(당시 29살. 순천역 철도원)씨 부인 진점순(97)씨는 20일 재판정에서 울먹이지 않았다. 판사도 유족도 눈시울을 붉힌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딸들이 “아빠가 죄 없다고 했다”고 전하자 “원래 착했어. 티끌만큼도 잘못이 없었는데”라며 입술만 악물었다. 이어 딸들이 “덕분에 한을 풀었다”고 주변에 인사를 건네자 “풀기는 뭘 풀어”라며 고개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26살 꽃다운 새색시와 세살, 한살 딸들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난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었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김정아)는 이날 형사 중법정에서 열린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장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집행하고도 일시, 장소, 행위 등 공소사실을 제대로 기록하고 보관하지 못한 책임은 국가에 있다.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와 유족들한테 무죄를 증명하라는 것은 가혹할 뿐 아니라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제주4·3의 생존 수형자 재심에서 “기록이 없어 유무죄를 판단할 수 없다”며 공소를 기각한 것과는 달리 “기록이 없지만 정부수립기 혼란 상황과 국가의 범죄 입증 책임 등을 고려해 명예회복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제주4·3, 여순사건의 민간인 희생자들이 잇따라 재심을 신청할 것으로 보이고, 국회에 계류 중인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디딤돌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재판부는 “검찰이 복원한 공소사실 중 포고령 2호 위반은 미군정 때 선포해 이미 효력을 상실했고, 내란죄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아 범죄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내용상 불법이 있다 해도 계엄법이 사형을 집행한 지 한해 뒤에 제정돼 계엄령의 효력에 대한 다툼이 있고,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공소사실을 통지하지 않은 점은 절차적으로 중대하고 명백한 흠결”이라고 강조했다.
김 재판장은 이어 “재심 청구인 3명 중 2명은 선고를 보지 못하고 숨져 절차를 종결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국가폭력에 의한 억울한 피해를 형사절차를 통해 개별적으로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특별법을 제정해 일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판결을 맺으며 “장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고 국가혼란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킨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이었다.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를 더 일찍 회복해 드리지 못한 점을 숨진 장씨와 유족한테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여순민중항쟁전국연합회는 이날 “이 판결을 계기로 국가는 여순 유족들한테 진정으로 사죄하고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19일, 4·3 진압을 거부하며 국군 제14연대가 봉기하면서 시작됐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초토화 진압 작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이뤄진 무차별 부역자 색출로 전남 동부권은 피로 물들었다.
반란군이 여수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순천까지 진입했던 까닭에, 기차를 징발당한 철도국 공무원들도 반군 협조자로 몰려 피해가 컸다. 장씨는 1948년 11월10일 전남 순천에서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군경에 체포된 뒤 20여일 만인 같은 달 30일 이수중 터에서 총살됐다. 장씨와 신태수(당시 32살·농업), 이기신(22·〃)씨 등 희생자 3명의 유족들은 2011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청구 7년5개월이 지난 지난해 3월21일 “이들이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됐다”며 재심을 결정했다.
안관옥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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