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가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4·3 당시 희생된 수형자들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남편 시체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어요? 이렇게 죽어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100살이 다 돼가는 현경아(97·제주시 아라동)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주4·3 초토화가 한창이던 1948년 11월 군·경에 의해 마을이 불에 타자 현씨와 남편(오형률) 등 가족들은 지인이 있는 남문통(제주시 이도1동)으로 피신했으나 얼마 뒤 경찰이 찾아와 산에서 왔다며 남편을 끌고 갔다. 같은해 12월8일 열린 군법회의에서 남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로 갔다. 현씨는 더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조부모와 부모·형제 등 일가족 8명이 처형된 현장에서 살아난 이상하(84·서귀포시 중문동)씨는 형님(당시 25)이 당시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돼 이번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씨는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오고 대통령이 사과했다. 4·3특별법이 제정돼서 해결될 줄 알았지만 해결이 안 돼서 재심청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4·3 당시 진행된 군사재판의 불법성이 입증된 가운데 이번에는 당시 행방불명된 수형자 유족들이 재심청구에 나섰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행불인) 유족협회의(회장 김필문)는 지난 3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 행불인 수형자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행불인 수형자는 4·3 당시인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제주에서 군사재판을 받은 뒤 다른 지방 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시기 행방불명된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전쟁 발발 직후 집단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행방불명 희생자 3500여명 가운데 군사재판으로 수형 생활을 한 수형자는 최소한 2530명이다.
수형자들의 인적사항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인 1999년 9월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추미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2530명의 이름과 형량, 형무소 등이 기록된 ‘수형인 명부’를 발굴하면서 알려졌다.
이번 행불인 유족협의회가 재심청구를 한 것은 지난 1월17일 수형 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재심청구 사건에서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형 생존자들이 자신들이 받은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호소한 것과 달리, 유족들이 직접 ‘불법적인’ 군사재판으로 수형 생활을 하다 실종됐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번 재심청구 소송은 행불인 유족들 가운데 10명이 먼저 나섰다. 수형 생존자들과는 달리 수형 행불자는 생존자가 없어 직계 가족이나 형제가 소송의 청구 대리인이 된다.
김 유족협의회장은 “재판을 한 번에 진행하는 것이 어려워 10명이 우선 재심을 청구하고, 이후 진생 상황을 보며 소송 규모를 확대하겠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손들이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피맺힌 아픔을 안고 살아왔으며, 유족들의 나이가 들어 지금이 아니면 더는 소송을 진행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4·3전문가들은 “행방불명된 수형자들이 많은데, 유족들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나이도 들고 어렵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제주4·3특별법에 군사재판의 무효화가 들어있는 만큼 하루빨리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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