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제주 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위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허호준 기자
제주 중산간의 비바람도 4‧3 유족들의 추모 열기를 막지 못했다. 3일 오전 제73주년 4‧3 추념식이 열린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는 강한 비바람 속에서도 아들딸과 손자들의 손을 잡은 유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특히 지난 2월26일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유족들이 맞는 이번 4‧3 추념식은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하게 다가왔다. 유족들은 4‧3평화공원 안 각명비를 찾거나 행방불명인 표석을 찾아 4‧3 당시 희생된 가족과 친척들을 추모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아버지와 큰오빠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서 김계옥(80)씨가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이날 아들과 함께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각명비를 찾은 김계옥(80)씨는 아버지(김성천‧당시 50)와 큰오빠(김윤조‧22), 작은 아버지(김성홍‧35) 등의 이름이 적힌 각명비 앞에 준비해간 제기를 닦은 뒤 과일과 빵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예를 갖췄다. 김씨의 가족들은 제주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 출신이다. 해마다 4월3일이 되면 이곳을 찾는다는 김씨는 “선흘리 유지였던 아버지의 얼굴을 어렴풋하게 기억한다”며 자라면서 친인척들로부터 가족이 희생된 사연을 들어알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1948년 11월26일, 큰오빠 이틀 뒤인 28일 토벌대에 희생됐다.
김씨는 “선흘리 육성회장을 하는 등 마을유지였던 아버지는 토벌대가 ‘마을청년들이 숨은 곳을 가르키라’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다가 희생됐다”며 “아버지가 희생된 이틀 뒤에는 큰오빠가 선흘곶자왈 굴에 숨었다가 함덕으로 귀순하러 내려가다가 엉물이라는 곳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희생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큰오빠는 김녕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의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했는지 잠깐 고향에 내려왔다가 숨졌다. 너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4‧3특별법이 개정돼 너무 반갑다”면서도 “보상한다고 목숨하고 바꿔지느냐”고 말했다.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에서 온 김임생(80씨는 아들 신철이(52)씨와 해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각명비를 찾아 제를 지낸다. 김씨는 “이처럼 날씨가 나빠도 해마다 찾느냐”는 기자의 말에 “아버진디 어떵 행?”(아버지인데 와야지요)하면서 “내가 7살 때 서북청년들이 한림지서에서 끌고간 것이 마지막이다”고 말했다. 아들 신씨는 “4‧3특별법 개정으로 4‧3추념식을 맞는 의미가 아주 달라진 것 같다. 이번 특별법 개정으로 4‧3 해결의 첫 단초로, 개정안이 잘 이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각명비 앞에서 유족들이 제를 지내고 있다. 허호준 기자
비바람이 주춤하자 각명비 위로 무지개가 내비쳤다. 행방불명인 표석에도 곳곳에서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아버지(양시우)의 표석에서 제를 지낸 뒤 술로 표석을 닦던 양천범(76)씨는 “내가 3살 때 아버지가 끌려가 행방불명돼 아버지 얼굴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릎에 한 번 앉았던 것은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김롱춘(76)씨는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뒤 언제 돌아가신지도 모른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오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비 맞으면서 왔다. 딸 얼굴도 모른 아버지를 찾아왔다”며 웃었다. 남편 홍우태(81)씨도 “장인 어른 얼굴도 모르지만 해마다 찾는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또다른 친척의 표석을 찾아 나섰다. 해마다 시아버지의 표석을 찾는 제를 올리는 현정수(73)씨는 “남편이 돌아가신 뒤에도 해마도 찾는다. 특별법이 개정돼서 그나마 위안을 찾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