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정광민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자연과학관(옛 상대) 근처 화단에 세워진 항쟁 표지석을 보고 있다. 김영동 기자
“얼마 전 둘러봤을 때 보이지 않았던 부마민주항쟁 표지석이 있네요. 늦었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전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 11일 정광민(61)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자연과학관(옛 상대) 근처 화단에 세워진 항쟁 표지석을 올려보며 말했다. 자연과학관은 40년 전인 1979년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의 불길이 시작됐던 곳이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부마민주항쟁은 이른바 ‘운동권’과는 관계가 전혀 없던 평범한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됐다. 민주주의 회복과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퇴진을 바라는 이들이 지핀 불씨는 부산 시민을 자극해 민중항쟁으로 커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잊혀진’ 항쟁으로 남아있다.
항쟁의 시작은 10월15일이었다. 당시 부산대 공대 3학년 이진걸씨 등은 유신독재 정권 퇴진을 담은 ‘민주선언문’ 450여장을 대학 곳곳에 뿌렸다. 다음날 정 이사장(당시 경제학과 2학년)은 민주선언문을 보고 친구들과 함께 ‘학내 시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유신헌법 철폐, 공평한 소득분배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는 밤 새워 등사기를 밀어 선언문 300장을 만들었다.
부마민주항쟁이 진행됐던 1979년 10월18일 정부의 계엄령 선포 뒤 부산대 새 정문 앞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청년학도여! 시정을 요구하면 무참히 탄압하는 유례없는 독재다. 방관만 하겠는가. 너희들의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이의 사명감, 책임감으로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선언문에는 유신헌법 철폐, 공평한 소득분배, 학원사찰 중지, 학도호국단 폐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반윤리적 기업주 엄단, 전 국민에 대한 정치보복 중단 등이 담겼다. 정 이사장은 “당시 가장 필요했던 것은 행동이었다”고 했다.
16일 오전 9시30분 상대(현 자연과학관)에 도착한 정 이사장 등은 강의실을 돌며 학생들에게 선언문을 돌렸다. 그는 “이제 투쟁할 때가 왔다. 유신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자”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놀란 학생들은 이내 그들과 함께했다.
“100여명이 상대 앞에서 대오를 갖췄어요. 투쟁가도 몰랐던 학생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자유’로 개사해 노래했습니다.” 정 이사장은 선두에서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도서관(현 건설관)으로 향했다. 상대에서 도서관까지 300여m 길에는 음대·자연대·문리대·공대와 대학 본관 등이 몰려 있었다. 정 이사장은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놀라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시위가 드디어 터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부마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정광민 10·16 부마항쟁연구소 이사장이 부산대 새 정문 앞에 서 있다. 김영동 기자
시위대가 도서관 앞 잔디밭에 도착했을 때 100여명의 시위대는 300여명으로 불었다. 도서관 근처에 잠복했던 사복 경찰관 2명이 정 이사장을 붙잡아 연행하려고 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사복 경찰관들을 물리쳤다. 학생들은 계속 모였고,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도서관에서 운동장(넉넉한 터)으로 향했다. 대오 곳곳에서 “시내로 나가자”는 외침이 나왔다.
시위대는 새 정문으로 향했다. 새 정문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 기동대가 곧바로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경찰은 최루탄으로 응사했다. 시위대는 다연발 최루탄을 쏘는 페퍼포그 차를 앞세운 경찰에 밀려 도서관에 다시 모였다. 정 이사장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는 “친구들이 ‘너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 경찰들이 얼굴을 알았으니 빨리 피신해라’고 말하며 2만원을 건넸다. 한 친구와 옷을 바꿔 입고 학교를 빠져나와 경남의 친구 집으로 피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55분 경찰과 대치했던 시위대 가운데 1000여명이 옛 정문을 통해 시내로 나갔다. 오전 11시37분 500여명이 부산대 사범대 부속고교(현 엔씨백화점) 한쪽 담을 넘어갔고, 11시55분께 700여명이 다시 시내로 진출했다. 도로를 지나가던 버스 기사나 승객들은 시위대에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하지만 동래구 온천장 네거리에서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에 쫓겼다. 일부 시위대가 동래구 사직동 미남교차로 등에서 돌을 던지며 경찰에 저항했지만 최루탄과 진압봉을 앞세운 경찰에 밀려 발걸음을 학교로 되돌렸다. 당시 국문학과 3학년이던 백하현(63)씨는 “‘남포동으로’라는 외침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기억했다.
지난 11일 부마민주항쟁 시위에 참여한 백하현씨가 1979년 당시 부산시청 앞 탱크와 장갑차가 있던 곳에 서 있다. 현재 이곳은 백화점이 들어섰다. 김영동 기자
16일 오후 중구 남포·광복동으로 학생들이 모였다. 부산대 시위에 자극받은 동아대와 고신대 학생들도 함께했다. 남포·광복동은 부산 최대 번화가답게 평소에도 인파가 붐볐다. 학생들은 부영극장 앞(현 비프 광장)과 미화당백화점 앞(현 창선파출소 맞은편 터), 국제시장 등지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경찰의 진압에 해산과 집결을 반복하며 대항했다. 저녁부터 퇴근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동참했다.
시민들까지 시위대에 가세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을 휘두르는 등 진압 강도를 높였다. 시민들은 가로수 지지대를 뽑아 만든 몽둥이와 돌 등으로 경찰에 맞섰다. 시위는 격렬해졌다. 파출소 9곳이 파괴됐고, 파출소에서 떼어온 여러 장의 박정희 대통령 사진도 불탔다. 정부는 군부대 출동 편성에 나섰다가 밤늦게 시위대가 자진해산하자 군 투입 결정을 미뤘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리시위는 17일에도 계속됐다. 유신선포 7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백씨는 “이날 부산대는 임시 휴교했다. 근처 기원에서 (시위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부산대 학생 700여명은 학교 안에서 시위를 이어갔지만 경찰의 진압에 쫓겼다가 오후 2시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동아대 학생들도 행동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로 총학생회 대신 들어선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학생 1500여명은 이날 정문을 뚫고 시내로 나아가려 했지만 경찰 등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민·학생 시위대 행렬.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17일 오후 6시께 동아대 학생 1000여명을 비롯해 부산의 대학생들이 부영극장 앞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어깨동무하고 유신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청 쪽으로 향했다. 백씨는 “지금은 상상 못 할 엄중한 시대인데도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의 수가 놀라웠다.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달아났는데 상인들은 가게 셔터를 내리거나 양철 문으로 입구를 닫으면서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줬다. 진압하는 경찰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부산 시민들은 17일 퇴근 시간 시위에 대거 참여했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김창우씨는 부마민주항쟁을 기록한 책 <다시 시월 1979>에서 “남포동 근처 부평동에 있던 옛 법원 근처 도로에 사람들이 꽉 찼다. 시민이 대부분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시장 상인 이아무개(75)씨도 “나라에 도움에 되는 일이었다. 용기 있는 청년들 덕택에 지금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부마항쟁 진상규명이 늦어 시민들이 얼마나 시위에 참여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5만여명이 시위에 나섰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니 정부도 깜짝 놀라 다음날(18일)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것”이라고 했다.
시위대는 17일 경찰서 2곳과 파출소 10곳을 부쉈다. 경찰차 6대가 불탔고, 12대는 부서졌다. 전날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사도 공격했다. 유신체제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방송만 무사했다. 정부는 저녁부터 군인 1432명을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찰이 부산 중구 광복로에서 페퍼포그 차로 최루탄을 분사하는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정부는 18일 새벽 0시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단체활동 금지, 영장 없는 체포 등을 알리는 계엄 포고문이 발표됐다. 해병 7연대와 3공수 특전여단도 투입됐다. 계엄군은 부산의 대학들과 관공서 등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했다. 군인을 태운 군 트럭이 부산대와 동아대를 오가며 순찰에 나섰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등 일부 대학에서 학생들이 시위 등을 벌였지만 곧바로 군과 경찰에 진압됐다. 시민들도 도심 곳곳에서 작은 규모로 시위에 나섰지만 군과 경찰에 강제 해산됐다. 옛 시청 앞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도 진압됐다. 서면교차로에선 시민 1만5000여명이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며 태화백화점(현 쥬디스태화)으로 행진해 해병대와 대치하다 밤 10시께 해산했다. 19일에도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 시민 400여명이 모여 군과 경찰에 야유를 보내다가 3공수특전여단 기동타격대에 진압됐다.
정부는 16일부터 19일까지 부산에서 대대적인 유신독재철폐 시위가 잇따르자 총을 든 군을 앞세워 강경 진압했다.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위원회)의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을 보면, 79년 당시 부산의 전체 검거 인원은 1058명이다. 시민 661명, 학생 397명으로 나타난다. 학생들이 불씨를 지폈고 시민들이 부채질과 기름을 끼얹으며 큰 불로 키웠다. 위원회는 “항쟁은 지도부가 없고 계획되지 않았던 자생적 자발적 저항이었다”고 분석했다.
“부마민주항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어요. 국가기념일도 올해 지정될 정도에요. 이제 시작인 셈이죠. 정부도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회복 등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주길 바랍니다.” 정 이사장은 부마민주항쟁을 범시민적 민주화운동의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79년 10·16 부마민주항쟁,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10 6월항쟁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백씨는 “민주주의라는 집을 짓는데 부마민주항쟁이 벽돌 구실은 했다고 본다.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배척됐던 피해자의 아픔을 정부가 치유에 애써주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했다.
부산/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부마민주항쟁이 진행됐던 1979년 10월18일 정부의 계엄령 선포 뒤 중구 남포동의 부산시청 앞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