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균분상속서 장자 우대로 바뀌는 과정 깔린 사건
임금·대신 논쟁까지 비화, 이항복 ‘유연전’은 공분 사기도
임금·대신 논쟁까지 비화, 이항복 ‘유연전’은 공분 사기도

권내현 지음/너머북스·2만3000원 유유는 16세기 조선, 대구의 양반가 자제다. 그는 이항복을 비롯해 당대 지식인들이 남긴 각종 문헌과 책에 등장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이는 1556년 그가 감행한 가출에서 비롯됐다. 유유가 집을 나간 이유는 가정불화와 우울증쯤 되겠다. 주변 증언에 따르면, 그는 현감을 지낸 아버지 유예원과 갈등이 잦았고 결혼한 지 3년 된 아내 백씨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심질(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던 유유가 6년 만에 발견된다. 유유를 찾은 사람은 달성군 이지인데, 세종대왕을 고모부로 둔 왕족으로 유유의 자형(누이의 남편)이었다. 이지는 처가에 “가출한 유유가 해주에서 채응규라는 이름으로 새 아내(첩) 춘수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가 친척들이 연이어 유유를 방문하고 동생 유연도 기대에 부풀어 형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유유가 몰라보게 변했다. 6년 새 키가 크고 체구도 커졌다. 작고 누르스름하고 수염이 없던 얼굴이 크고 검붉은 수염투성이로 바뀌었다. 가늘던 음색이 굵고 쩌렁쩌렁해졌다. 채응규는 정말 유유일까? 의견이 둘로 갈렸다. 그를 처음 발견한 이지와 유유를 먼저 만난 몇몇 친척들은 “풍상과 추위, 배고픔에 시달려 얼굴이 달라졌다”며 채응규는 유유가 맞다고 했다. 반면 동생 유연은 채응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가 가짜라는 심증을 굳히고, 노비들을 시켜 포박한 다음 대구 관아로 끌고 가서 수령 박응천에게 진위를 가려달라고 했다. 옥에 갇힌 채응규는 아내 백씨와의 첫날밤 기억까지 들추며 자신이 유유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유력 증인인 아내 백씨는 유유를 만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 사이 유유의 첩 춘수는 건강악화를 이유로 유유의 보방(보석)을 요청했는데, 결국 보방이 허락되어 감옥에서 나온 유유가 며칠 뒤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처음에 사람들은 채응규가 가짜 유유라는 사실이 밝혀질까봐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유유의 첩 춘수와 아내 백씨가 “유연이 재산이 탐나 형 유유를 살해했다”고 고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가출사건이 사기사건이 되었다가, 이제 살인사건이 된 것이다!

옥살이를 하게 되면 식사와 세탁 등의 비용이 모두 투옥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유유(채응규)의 첩인 춘수가 옥바라지를 했다. 그림은 김윤보의 <형정도첩> 중 수감된 죄인에게 가족이 음식을 넣어주는 모습. 너머북스 제공

1570년 제주에 사는 김두년이 다섯 자녀에게 재산을 골고루 분급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 경주 양동 경주 손씨 서백당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문서자료관 제공

1607년 이항복은 유연의 아내 이씨의 집에 내려오는 자료를 모아 <유연전>을 펴내고, 유유 사건을 새롭게 조명했다. 너머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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