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책이 내게로 왔다

앙투안 드 베크·노엘 에르프 지음, 임세은 옮김/을유문화사(2021)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는 작년 에릭 로메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하려고 했던 작품이다. 그의 영화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네마테크의 영화제 프로그램을 통해 마니아층을 형성했는데 출판계에서도 본격 인터뷰집인 <에리크 로메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이 출간되었다. 또한 그의 대표작 이름을 딴 출판사가 탄생했으며 최근 그의 유일한 소설집인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와 애정이 묻어난 각본집이 등장하고 로메르 관련 영화 특강이 모든 준비를 마칠 무렵 한국어판 전기가 완성되었다. 적절한 마케팅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지만, 1천 페이지가 넘는 원고를 다듬느라 고생한 번역가의 노고와 정성을 알기에 이번 출간 자체가 꿈만 같다. 타고난 은둔자형에 속하는 인물이었기에 적절한 표지 사진을 정하느라 애를 먹었고 부제는 ‘위대한 시네아스트의 보통의 신비’ 또는 ‘은밀한 시네아스트’를 염두에 두었다가 출간이 임박하면서 원고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은밀한 개인주의자’로 지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나 브이에이치에스(VHS) 비디오를 통해 <클레르의 무릎>,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수집가들> 등을 기회가 닿는 대로 감상하다가 연출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에릭 로메르에 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결정적 계기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사계절 연작’에 속하는 <겨울 이야기>를 보고 나서였는데 그는 일상 속에 찾아온 우연이나 누구나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지점에서 삶의 정수(精髓)를 포착하는 연금술사였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에 이토록 정성을 기울이는 이가 있었던가. 프루스트와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문학과 미술 그리고 연극을 비롯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관심이 많았던 로메르는 동세대 감독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에 입문했지만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신비감을 증폭시켰다.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가 포함된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국내 출판시장에서 평전 분야,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전기 시장이 미미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준비했는데 이 말은 사전 모니터링이나 설문 조사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그러니까 시장 조사를 생략했기에 출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빌 에반스>로 출발한 본 시리즈가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이런 저주받은(?) 프로젝트를 지지해준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중에서도 피나 바우쉬, 트뤼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편이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교훈적인 속성에 치중하지 않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 세계와 다르게 모순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들, 위대한 명성을 쌓았지만 결국 누구나 상처받고 가슴 아프고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온 기록에 주목하였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취지보다는, 평범하다고 여겼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우주’에 깊이 다가가고 싶어서 탄생한 기획이다. 딜레마와 부조리의 세상을 온몸으로 체현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다가간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가 독자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자 ‘당신 인생의 이야기’로 오래 기억되기를.

정상준 을유문화사 편집주간.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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