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1431년(세종 13) 2월28일 세종은 좌부대언(左副代言) 윤수(尹粹)에게 <좌전>(左傳)을 많이 인쇄해서 보급하라고 지시한다. 세종의 말은 이렇다. “<좌전>은 학자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서적이다. 주자(鑄字, 금속활자)로 인쇄한다면 널리 반포하지 못할 것이니 ‘목판’에 새겨 간행하라.”
금속활자는 쉽게 마모되지 않기에 대량의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 목판인쇄는 다르다. 인쇄가 계속되면 목판이 마모되고 글자가 뭉개져 인쇄물은 흐릿해진다. 동일한 텍스트의 대량 복제에는 목판이 아닌 금속으로 만든 활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많은 부수의 책을 얻기 위해 목판을 사용해야 한다고 꼬집어 말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금속활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대체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근거한 것이다. 마모되지 않는 활자로 대량의 인쇄물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는 것! 대량의 인쇄물로 인해 소수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이 해체되었고, 이로써 근대로 향하는 중요한 경로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한국의 내셔널리즘이 끼어든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근대를 열었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훨씬 앞서 발명된 것이다(고로 한국인은 위대하고 우월하다!). 내셔널리즘의 선전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 한국의 금속활자는 대량의 인쇄물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지식의 해방에 기여하지도 않았다.
구텐베르크는 필사본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의 금속활자는 목판인쇄가 인쇄의 대종을 이루는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목판인쇄의 부족처를 메우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곧 금속활자는 목판인쇄를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판인쇄와의 병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목판인쇄는 나무를 선별하고 건조하고 판목(版木)으로 만들고 글자를 써서 새기는 과정에 재료와 노동력이 엄청나게 소요된다. 목판을 보관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목판을 관리하는 데도 적잖은 비용이 든다.
필사하기에는 성가시고 목판 제작의 비용이 부담스러운 부수가 있다고 하자. 금속활자는 이 경우를 충족시킨다.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알려진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1234~1241년 사이에 인쇄됨)은 28부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이 사실에 주목해 보자. 28부는 애매한 부수다. 필사본을 만들자고 하니 성가시고, 목판본을 만들자고 하니 비용이 만만찮다. 또 목판본은 제작기간이 길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는 빠른 시간 내에 원하는 인쇄량을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애매한 상황의 압력이 증가하여 결국은 금속활자를 만들어내게 했을 것이다. 물론 달리 고려해야 할 사정도 있으나, 지면 관계상 줄인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목판인쇄의 부족처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목판인쇄를 대체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곧 금속활자는 목판인쇄와의 병존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는 제작과 사용의 컨텍스트가 사뭇 다른 것이다. 근자에 인사동에서 조선전기의 금속활자가 쏟아져 나왔다. 영영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문화재의 출현은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번의 금속활자 출현이 한국 금속활자의 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세종 때 만든 갑인자로 추정되는 한자 금속활자들. 크기상 소자(小字)에 해당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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