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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특허·협의·의견은 모두 검열이었다

등록 2021-07-16 05:00수정 2021-07-16 09:36

부르봉·영국령 인도·동독의 출판 통제 ‘인류학적 분석’
호평·격려하기도 했지만 국가권력의 교묘한 검열 명백

검열관들: 국가는 어떻게 출판을 통제해왔는가
로버트 단턴 지음, 박영록 옮김/문학과지성사·2만2000원

18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검열관이 로버트 단턴의 <검열관들>을 검열한다면 어떨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검열의 역사, 검열관의 일상에 대한 놀랍도록 생생한 묘사, 전문적인 내용을 재치 있고 매끄러운 필치로 엮어낸 매혹적인 책”이라고 극찬하지 않을까. 당시 검열관들이 공들여 쓴 출판 허가서는 오늘날의 서평이나 추천사 비슷했으니 말이다.

이 책이 영국의 식민지배 당시 인도에서 출간됐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900년 이전이면 도서관 사서들의 서평 비슷한 의견이 첨부된 채 인도행정청이 작성한 도서목록에 수록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1900년 이후라면 단턴이 경찰에 쫓기거나 재판에 회부될 가능성도 있다. 죄목은 ‘영국령 인도에 사실상 출판의 자유가 없다’는 등의 내용을 적시해 대중을 선동했다는 것쯤 되겠다.

20세기 공산주의 동독이었다면, 아예 출간이 불발될 공산이 크다. 단턴은 원고 기획부터 시작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분량은 물론 단어와 표현에 이르는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편집자와 끊임없는 ‘협의’를 거칠 테고, 이 과정이 검열의 역사를 통찰한 이 책의 집필의도와 상반된다는 생각에 출간을 포기하고 망명을 결심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칭찬 일색의 18세기 프랑스의 검열은 선이고, 협의라는 이름으로 작가를 옥죈 20세기 동독의 검열은 악일까? 아니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검열하는 쪽이 악이고 검열에 맞서 투쟁하는 쪽이 선일까? 그처럼 이분법적인 시각을 넘어, 그간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검열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해보겠다는 것이 단턴의 야심찬 포부다.

그의 별명은 ‘책의 역사가’. <뉴욕타임스> 기자로 일했고 옥스퍼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역임한 단턴은 6편의 저술을 통해 18세기 프랑스 문화를 새롭게 해석한 베스트셀러 <고양이 대학살>(1996·국내 출간 기준)을 비롯해 <책의 미래>(2011), <책과 혁명>(2014) 등 책과 출판이라는 프리즘으로 유럽사를 재조명한 저술로 이름이 높다.

단턴은 이 책에서 검열의 역사를 비교사적, 민족지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특히 “검열이라는 용어에 집중하기보다 당대에 쓰였던 언어의 의미를 포착해 내고자” 했으며, “문화 체제의 기저에 깔린 분위기와 그 체제 내에서 (검열에 해당하는) 행위에 영향을 미치던 잠재적인 사고방식이나 암묵적인 가치관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를 위해 세 곳의 권위주의 체제를 집중적으로 살폈는데, 18세기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19세기 영국이 통치한 인도,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 동독이다.

이들 체제에서, ‘검열’은 각기 다른 용어로 지칭됐다. 18세기 프랑스에선 ‘특허’라는 말로 통용됐다. 책이라는 것이 ‘왕이 내린 은총의 산물’이었던 만큼 왕립행정기관인 서적출판행정청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잼 통이나 비스킷 상자”와 같이, 특허 받은 책은 질 좋은 제품임을 인정받은 셈이었고, 이를 승인하는 검열관은 품질을 보증하는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검열 과정을 거쳐 출간된 &lt;아메리카 섬으로 떠나는 새로운 여행&gt;(1722) 표지 맨 아래에는 “왕의 허가와 특허를 받았다”고 표기돼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18세기 프랑스에서 검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아메리카 섬으로 떠나는 새로운 여행>(1722) 표지 맨 아래에는 “왕의 허가와 특허를 받았다”고 표기돼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부르봉 왕조의 검열지시서. 1751년 2월28일에 작성됐으며, 검열관 보즈에게 &lt;헤르쿨라네움 회화에 관한 편지&gt;라는 원고를 검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부르봉 왕조의 검열지시서. 1751년 2월28일에 작성됐으며, 검열관 보즈에게 <헤르쿨라네움 회화에 관한 편지>라는 원고를 검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벵골지역에서 출판된 분기별 도서 목록. 도서 목록은 인도행정청의 보안문서로 회람됐으며, 저자와 출판업자를 선동죄로 기소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벵골지역에서 출판된 분기별 도서 목록. 도서 목록은 인도행정청의 보안문서로 회람됐으며, 저자와 출판업자를 선동죄로 기소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하여, 프랑스 검열관들은 안목 있는 독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와중에 짬을 내어, 때론 주객이 전도될 정도로 몰두해 원고를 읽었다. 그러곤 “매혹적인 요소가 가득한 책”,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고 극찬하며 특허를 승인하기도 하고, “감식력과 안목이 결여된 편서”, “문체가 끔찍하다!”는 비판과 함께 기각하기도 했다. 열정 넘치는 검열관은 작가에게 연락해 부족한 부분에 대한 수정방안을 제안하거나 작가의 논지와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밤샘토론을 벌였다.

19세기 영국령 인도에서도 검열관의 의견이 신문이나 잡지의 칼럼처럼 읽히고 비평으로 확대되는 일이 있었다. 1867년 서적 출판과 등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인도 전역에서 출판되는 서적을 모두 기록해 ‘도서목록’을 만들라는 총독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각 지역 관리들이나 도서관 사서들이 작성한 도서목록의 여러 항목 가운데 ‘의견’란이 갈수록 길어지더니, 옆 칸을 침범하고 기어이 한 면을 몽땅 차지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미담에 혹하거나 ‘도서목록’이라는 유순한 명칭에 속아 상황을 오해해선 안 된다. 도서목록은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행정청의 에이(A)급 기밀문서였고, 1900년 이후 인도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이를 감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됐던 것이다.

20세기 동독에서 검열은 ‘협의’라고 불렸다. 단턴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7개월이 지난 1990년 6월 동베를린에서 두 명의 동독 검열관을 만나 감격적인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직무가 검열이 아니라 “출판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협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협의는 작가와 편집자뿐 아니라 외부 심사위원, 출판사, 출판총국, 당 중앙위원회 문화분과,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 최고위층과도 이루어졌고, 모든 협의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출판총국의 인쇄허가가 떨어졌다. 게다가 출판총국은 연간 출판계획을 세워 한해 동안 동독에서 발간될 모든 출판물을 사전에 결정했기 때문에, 동독에선 어떤 출판물도 사적으로 기획, 제작, 발간될 수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검열관들은 자신이 검열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고, 선한 의도로 책을 읽고 호평하거나 작가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열관 개인의 의도나 행동과 상관없이 이 모든 과정은 국가권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 침해이며 이는 사회 전반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오늘날까지 우리 삶 깊숙이 드리운 검열의 그림자, 디지털 세상에서 더욱 교묘하게 작동하는 ‘검열의 일상화’를 경계한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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