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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집안의 ‘좌우갈등 비극’ 소설화 꿈 60년 만에 이뤘죠”

등록 2021-07-28 18:10수정 2021-07-28 22:32

【짬】 원로 독문학자 안삼환 명예교수

안삼환 교수 뒤로 20세기 독일 작가 토마스 만 사진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안삼환 교수 뒤로 20세기 독일 작가 토마스 만 사진이 보인다. 강성만 선임기자

“일생을 이 소설 한 권 쓰려고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원로 독문학자 안삼환(78)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장편소설 <도동 사람>(부북스)을 펴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젊은 베르터의 괴로움> 등 여러 독문학 작품을 번역했고 독문학을 다룬 저술도 여럿이지만 소설 창작은 처음이다.

“법대 진학을 바라는 부친 뜻을 따르지 않고 독문학을 전공한 것도 사실 소설을 쓰고 싶어서였죠. 고교 시절 독일 망명 작가 이미륵 선생이 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보면서 소설가도 하나의 직업으로 가능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작품이 독일인들한테 상당한 영향을 주었잖아요. 1969년 잡지 <사상계> 소설 공모에서 떨어졌으니 반세기 만의 지각 등단이네요. 허허.”

그는 연세대 독문학과 교수로 부임한 1976년 8월부터 서울대에서 퇴임한 2010년 2월까지 약 33년 동안 두 대학 강단에서 독문학을 가르쳤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낙산공원 근처 자택에서 안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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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 사람> 표지

소설은 광주 안씨 완귀공파 집성촌인 경북 영천 도동마을에서 난 주인공 안동민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자전적 소설이지만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썼다”는 작품은 안 교수와 그 일가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겪은 실제 이야기를 뼈대로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였다.

동민 아버지가 해방 직후 여운형 선생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 영천지부 금호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바람에 대구 10월 항쟁(1946년)과 한국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두 차례 죽을 고비를 겪는 장면은 실제 안 교수 선친 이야기다. 한국전쟁에서 도동마을의 숱한 가장들이 국군과 인민군 총부리에 희생된 것도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다. “해방 당시 도동마을 100여 가구 중 타성은 10가구도 안 됐어요. 해방 이듬해 퍼진 콜레라와 6·25로 문중 가구 70%가 타격을 입었죠. 문중에서 똑똑한 남자 이삼십명이 6·25 때 정치적으로 희생됐어요. 영천은 6·25 격전지여서 밤에는 마을에 인민군이 내려오고 낮에는 경찰이 왔죠. 낮에 누군가 경찰한테 인민군에게 밥해준 사람을 밀고했고, 밤에는 또 다른 사람이 그 밀고자를 인민군에게 알려줬어요. 이 때문에 원수가 된 문중 사람들도 있었죠.”

대구의 명문고로 진학한 동민은 안 교수가 실제 겪은 대로 이승만 독재에 맞선 1960년 대구 2·28 학생 시위를 벌이다 쓰러져 기마대 말발굽에 밟힐 위기를 겪었고, 대학 3학년인 1964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경찰 곤봉에 맞아 의식을 잃기도 한다.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조직에 가입하라는 동료 유학생의 권유를 “고국에서 대학교수가 돼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가르치고 싶다”며 거절한 일화도 담았다.

그는 코로나가 온 지난 1년 꼬박 소설 집필에 매달렸다. “제가 독문과에 간 것은 고2 때 읽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1875~1955)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서였죠. 마을에서 문중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했던 부친은 아들이 판사나 검사가 되어 쇠락한 문중을 일으켜 세우길 바랐지만요. 만의 작품은 우리로 치면 양반 계급이었던 독일 뤼벡 지역 상인의 4대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음악에 정신이 팔린 4대 아들이 일찍 죽어 가문이 몰락해요. 이 책을 읽고 저도 나중에 좌우갈등으로 망하다시피 한 집안 얘기를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제목이 말하듯 소설 주인공은 광주 안씨 완귀공파 문중에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동민이 주요 갈림길에서 취하는 선택의 큰 잣대도 ‘문중을 빛낼 수 있는지’다. 안 교수에게 가문의 의미가 뭔지 물었다. “제가 문중을 말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우리 집안이 잘 돼야 한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유가에서는 ‘수기치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자기 인격을 완성해서 그 힘으로 남을 다스린다는 거죠. 여기서 남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여를 강조한 거죠. 집안과 향리 문중 등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해 국가와 인류 같은 큰 공동체로 나아갑니다.” 그는 “도동마을은 충효 사상이 몸에 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며 “마을에서 ‘공부 잘하는 네가 300년 전에 망한 우리 문중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압력이 컸다”고도 했다.

최근 자전적 소설 ‘도동 사람’ 내

해방 후 좌우 갈등·민주화 투쟁 등

실제 체험 바탕해 소설적 상상력

“고교 시절 토마스 만 소설 읽고

굴곡진 집안 얘기 소설화 꿈 꿔”

연세대·서울대서 33년 독문학 강의

그는 퇴임 뒤에도 후배 독문학자들과 함께 괴테와 토마스 만 작품을 읽는 모임을 각각 매달 한 차례 하고 있다. 괴테 독회는 내년이면 30년이고 토마스 만은 올해로 15년이다. 토마스 만 독회 모임은 작년에 그가 작품해설을 달아 단편 전집 첫 권을 내기도 했다. 재작년에는 같은 해 번역한 <젊은 베르터의 괴로움>(부북스)으로 국제 펜 한국본부 번역상도 받았다. 그는 고 김병옥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1992년에 한독문학번역연구소를 만들어 2대 소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 독문학계의 번역 수준에 관해 묻자 그는 “아직은 번역 문장이 아쉬움이 많다”고 답했다. “한국어와 독일어 두 언어에 다 능통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는 한국 독어독문학회장을 하던 2003년에 ‘제2외국어 교육 정상화 추진위원장’을 맡아 외국어 교육 다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일부 외고를 빼고는 한국 고교에서 독일어 교육이 전멸했어요. 대학도 영문과 다음에 독문과나 불문과가 오잖아요. 독일이나 프랑스가 중요한 문화 강국인데 학생들이 언어를 안 배우니 통탄할 노릇이죠. 고교에서 안 배우니 대학에서도 학점 받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안 배웁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독문과 학부에서 토마스 만 단편 강독을 했는데 지금은 못 해요. 학부 학생들도 고교생처럼 배워요. 법학이나 다른 전공을 공부하다 뒤늦게 적성을 찾아 독문과에 들어온, 머리 좋고 특출난 학생들이 독문과 교수가 되고 그러죠.”

그는 지금이라도 교육부가 제2외국어 교육 정상화를 위해 나설 것을 주문했다. “사실 제2외국어라는 말도 다른 나라에서는 안 씁니다. 일본 사람들이 일제 때 썼는데 지금 일본은 쓰지 않고 우리만 써요. 독일 고교는 여러 외국어 중 2개와 고전어 중 1개를 골라 가르칩니다. 광역지자체별로 최소 고교 한 곳씩을 택해 독어나 불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일본어나 중국어가 아닌 외국어 교육을 장려하는 학교로 지정해 학생들의 제2외국어 선택권을 넓혀야 합니다.”

그는 2012년 독일 고등교육진흥원이 주는 ‘야콥 및 빌헬름 그림 상’을 받는 자리에서 “독일문화는 지나치게 미국화된 우리네 삶의 모습을 교정할 수 있는 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유가 뭘까? “미국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일은 달라요. 가난해도 대학을 다닐 수 있어요. 독일에서 장학금은 여유 있는 생활비를 말해요. 또 독일은 입원하면 병원이 간병까지 다 책임집니다. 가족은 주말에 시간을 정해 면회만 하면 됩니다. 50년 전 독일 유학 때 이런 모습을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독일 문학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안삼환 교수가 자택 근처인 서울 낙산공원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안삼환 교수가 자택 근처인 서울 낙산공원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계획을 묻자 그는 “앞으로 소설을 더 쓸 생각은 없다”며 “한국 독문학계를 위해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 한 권 쓰고 작가로 자처할 생각은 없어요. 제 독문과 2년 선배인 고 이청준 작가는 소설 쓰기에 인생 자체를 걸었어요. 선배가 쓴 <당신들의 천국>(1976)은 유신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하는지 비유와 상상력으로 설명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너무나 무거운 사명감을 짊어진 존재이죠.” 덧붙였다. “헝가리 비평가 루카치는 신이 죽은 시대에 소설이 신을 대신해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고 했어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다 알려줄 수는 없지만 예감은 해야겠죠. 독자들이 제 소설을 읽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그게 바로 소설의 힘입니다. 해방 뒤 여운형과 이승만, 김구가 각축하다 분단이 고착되고 오랜 독재를 거쳐 민주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검찰이나 언론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 시대를 살아낸 어떤 보잘 것 없는 인물을 통해서요.”

마지막 질문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묻자 안 교수는 토마스 만 소설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선택받은 사람>을 꼽았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요셉을 다뤘지만 종교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만의 후기작 <선택받은 사람>은 이중의 근친상간이라는 원죄를 짊어진 사람의 이야기이죠. 하나님이 나중에 이 죄인을 교황으로 선택해요. 인간이 죄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를 만이 재밌게 썼어요. 토마스 만 독회 멤버인 김현진 선생이 지난해 우리말로 옮겼죠.” 그는 한국어 번역이 시급한 독일 작가로 장 파울을 꼽았다. “19세기 독일 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작가인데 어렵기도 해서 아직 번역이 안 됐어요. 초월적 자세로 현실을 내려다 본 지성적인 소설을 썼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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