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빛이 진 자리, 그림자가 맺히듯
진실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환해진다
시를 쓰는 일은 그림자를 마주보는 것
달팽이 뿔 위에서 손끝으로 세상을 만져보려는…
진실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환해진다
시를 쓰는 일은 그림자를 마주보는 것
달팽이 뿔 위에서 손끝으로 세상을 만져보려는…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김소연(39)씨가 10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민음사)의 말미에 붙인 산문 ‘그림자론’의 한 대목이다. “시 역시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라고 시인은 자문하거니와, 그림자론이란 곧 시론이라 할 수 있겠다.
빛을 등지고 그림자를 향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아니, 빛이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가 정면에 있을 때‘에(만)’ 시 쓰는 일은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림자는 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자 그 자체가 시의 어떤 속성을 닮았다. 어떤 속성을?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자세만이 남아 있다”(<빛의 모퉁이에서>)
그림자는 사물의 섬세한 굴곡과 색깔과 표정을 다만 하나의 검은 실루엣으로 뭉뚱그린, 닮긴 했어도 사물 그 자체는 아닌, 한갓 서툰 복사체를 가리킨다. 사물의 들고 나는 입체감은 평면으로 축소되고, 유채색이 무채색으로 단순해지며, 표정은 아예 지워져 없어진다. 그림자는 왜곡이고 결핍이다.
왜곡이고 결핍인 그림자가 어떻게 시와 등가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까. 그림자가 없는, 빛뿐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이 거꾸로 그림자를 생성시키는 역설을 참조해 보자.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빛의 모퉁이에서>)
그림자는 빛이 있는 한 따라붙는 부수적 존재이자, 빛의 자기완결성이 모종의 결함을 지니고 있음을 폭로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자신을 말살하기 위한 빛의 움직임을 스스로의 존재 근거로 삼는 특이한 물건이다. 부정적 의존의 존재학이랄까.
그림자의 심상은 여성성 빛과 사물과 그림자의 이런 관계를 시인은 꽃과 열매에 비유하기도 한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에 그림자가 맺힌다.”(‘그림자론’) 꽃이 보기에 화려하고 끌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어디까지나 허상이고 열매가 진상이라는 것이 시인의 인식이다. 꽃은 한시적인 반면 열매는 항구적이라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사물 자체의 풍성한 굴곡과 색깔과 표정은 거짓이거나 적어도 일시적인 외양에 지나지 않게 된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물의 화려한 겉모습이 단순한 그림자로 환원될 때 진상은 오히려 명확해진다. 시는 바로 그렇게 단순화한 그림자-진상에 관여하는 일이다.
“숙여 바라본 그림자만으로/당신이 왜 왔는지/알고도 남는다/(…)//침묵하던 당신이/어떤 행색의/어떤 뒷모습인지를”(<저녁 11월>)
“뒷자리에 남기고 떠나온 세월이/달빛을 받은 배꽃처럼/하얗게 발광하고 있다”(<너의 눈>)
“달/의 맨몸을 봤습니다//(…)//분명코 뒷모습일 겁니다”(<손톱달>)
인용한 시들은 그림자가 뒷모습 및 달과 친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물의 정면이 아닌 이면, 그리고 “매 맞듯 살이 아프”(<온기>)게 만드는 햇살이 아니라 달빛의 은은한 조명이 그림자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시를 보자.
“한 사람이/달을 베고 누워 있다/심장을 환하게 켜놓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다/(…)//누군가 늑골에 손을 넣어 두꺼비집을 내린다”(<불귀·6>)
어둠(=달 또는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심장(=진실)은 환해지는 것이다.
‘어머니’된 시인은 다만 바라볼 뿐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달이 여성의 상징으로 통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김소연씨가 노래하는 그림자와 달의 심상 역시 여성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시집에서 그려진바 그 여성을 산모와 마녀로 대별해 볼 수 있겠다.
“우중에 한껏 부풀어오른 야산을 관망하니/산모처럼 젖이 아프더라//(…)//여자가 쓰는 물건들은/왜 하나같이 움푹 패어 있어/무언가 연신 채워 넣도록 생겨먹었는지”(<진달래 시첩>)
“사랑하고 사랑하는 옷장 속의 사자와 마녀여/뛰어나와 포효하라/사자는 날뛰고 마녀는 날으라//(…)//제 그림자를 안 만드는 빛이건/빛이 필요치 않은 도처의 어둠이건/귀를 틀어막으며 납작하게 엎드리게 하라”(<옷장 속의 사자와 마녀>)
옷장의 구속과 빛 또는 어둠의 압제를 혁파하는 파괴적·공격적 성향 역시 엄연한 여성적 속성의 일부일 테다. 그러나 시집 전체를 통해 좀 더 강조되는 것은 산모 혹은 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5c꿈틀5c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5c꿈틀?5c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시인 지렁이 씨>)
한갓 미물일 따름인 지렁이의 꿈틀거림, 그리고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을 어머니 된 시인은 다만 바라본다(아마도, 틀림없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리고 말한다, “시 쓸 일이 없겠다”고.
시인은 짐짓 ‘시 쓸 일이 없겠다’고 눙치지만, 그 말 자체가 시인 것을 누가 모를 수 있겠는가. 시집의 맨 앞에 놓인 <달팽이 뿔 위에서>라는 시를 보자. “잠자는 짐승의 숨소리들”과 “상처난 식물의 코 고는 소리”와 “코끼리 발자국 속에 무수한 개미 발자국”을 듣고 보는 것이 시인에게는 곧 시를 쓰는 일이다. 달팽이 뿔(=더듬이) 위에 올라선 채 “점자책을 읽듯 손끝으로 세상을” 만져보려는 것이 시작(詩作)에 임하는 시인의 각오인 것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그림자의 심상은 여성성 빛과 사물과 그림자의 이런 관계를 시인은 꽃과 열매에 비유하기도 한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빛이 사물에게 진 자리에 그림자가 맺힌다.”(‘그림자론’) 꽃이 보기에 화려하고 끌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어디까지나 허상이고 열매가 진상이라는 것이 시인의 인식이다. 꽃은 한시적인 반면 열매는 항구적이라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사물 자체의 풍성한 굴곡과 색깔과 표정은 거짓이거나 적어도 일시적인 외양에 지나지 않게 된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물의 화려한 겉모습이 단순한 그림자로 환원될 때 진상은 오히려 명확해진다. 시는 바로 그렇게 단순화한 그림자-진상에 관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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