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반수연 지음 l 강(2021) 달라지고 싶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그럴 때면 변화를 꿈꾼다. 새로운 어딘가로 가는 상상을 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막상 낯선 곳에 발을 들이면, 싸늘한 공포가 마음을 강타한다.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를 향해 웃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닻을 내리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나가야 하는 그곳의 실상을 접하면 주변이 뿌옇게 변하면서, 두고 온 것들이 커다랗게 떠오른다. 익숙하기에 진저리쳤던, 떠나야만 살 것 같았던 많은 사물과 사람들이, 그립기 그지없는 대상이 되어 엄습해온다. <통영>의 표제작은 살던 곳을 떠나 이민자로 살아가던 한 남자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화자의 의식은 나고 자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이 공기처럼 화자를 에워싸고, 커다란 화환에 새겨진 ‘반갑지 않은 이름’이 기다렸다는 듯 시야를 침투해온다. 성장기 동안 자신을 휩싸고 돌던 출생의 비밀,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꼬리표가 어김없이 날아와 들러붙는다.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떠나온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절차를 묵묵히 통과하던 그에게 마지막 순간,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온다. 어쩌면 자신을 떠나게 만든 주원인 제공자일 수 있는 그 인물이 행한 뜻밖의 일을 전해 들으며 그는 바닥에 눕는다. 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며 생각한다.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누나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소설의 말미에 덧붙이듯 언급되는 이 짧은 장면 덕분에, 독자는 암울해 보이기만 했던 이야기 전체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나 희망은 외부에서 온다. 절대로 곁을 줄 것 같지 않았던, 그래서 지옥이라고 생각했던 타인에게서. 나를 거꾸러뜨리는 절대적인 힘이면서 뜻밖의 순간에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힘, 그것이 타인이다.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문학작품에서 수없이 변주되는 테마이다. 가족과 고향은 지금의 나를 탈피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이지만, 이미 내 안에 일부가 담겨 있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와도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철통 같은 원형이다. 떠나온 내 몸 안에 담긴 일부는 저를 만들었던 원형을 그리워하며 끈질기게 울부짖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매일 먹던 음식에 대한 갈구로, 당연한 듯 호흡했던 공기와 냄새에 대한 향수로 불쑥불쑥 침투해 일상을 흐트러뜨린다. 가족이 원래 속했던 사회적 계급과 다른 계급으로 이동해간 경우에는 끈적한 죄책감까지 따라붙는다. <힐빌리의 노래>나 <랭스로 되돌아가다> 같은 작품에는 가족이 속했던 계급에서 빠져나온 ‘지식인’들이 겪는 혼란과 고뇌가 치밀하게 담겨 있다. 떠나온 곳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다뤘다는 점에서 같은 계열로 묶일 수 있겠지만, 예기치 않았던 외부로부터의 빛이 무의식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의 화자를 비추며 끝난다는 점에서 문학작품 ‘통영’은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결을 지닌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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