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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폴란드어발 모국어행 여정의 고통과 기쁨

등록 2021-10-08 04:59수정 2021-12-03 14:53

[한겨레Book] 번역가를 찾아서
폴란드어 번역가 최성은


바르샤바대학 한국인 최초 박사
나뭇잎·파도소리 같은 발음에 매료
폴란드책 32권, 한국책 9권 번역
영어 등 안 거친 ‘직접 소통’ 의미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 1989년, 고교 3학년이던 최성은은 ‘철의 장막 너머 사람들은 무슨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를 갖고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이듬해 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학과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국내 학계를 통틀어 폴란드에서 공부하거나 학위를 받은 이가 한 명도 없었다. 1989년 11월 폴란드가 민주화되기 전까지는 교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공자들은 독일이나 미국에서 공부해야 했다. 최성은은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유일’한 폴란드어학과를 졸업하고, 폴란드 문학 전공자로 바르샤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다.

“폴란드어 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덜컥 입학을 했죠.(웃음) 러시아 옆 나라니까 키릴문자를 쓸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라틴문자(알파벳)를 써요. 영어와 달리 자음을 두세 개 겹쳐 써서 하나의 소리(음소)를 만들기도 하는데, 처음 들었을 땐 마치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잔잔한 파도가 술렁거리는 소리 같았어요.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던지 가슴이 막 뛰었지요.”

폴란드어는 “중세 이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슬라브어”로, 10권의 사전이 부족할 만큼 방대한 어휘와 풍부한 표현력을 자랑한다. 덕분에 이국의 언어를 체화해야 하는 번역가 지망생에게 배움의 길은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전 세계 언어학자들에겐 탐구의 원천이요, 작가들에겐 영감의 도구로 이름이 높다. 폴란드가 5명(국적으로 따지면 6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문인의 이름을 딴 거리와 동상이 즐비하며, “3명 중 1명이 작가”라는 농담이 오가는 ‘문학의 나라’인 데는 이런 폴란드어의 특징도 한몫했다.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으로서 최성은의 번역가 이력은, 2004년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바로오 2세의 시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출판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그 목록이 더 길어졌다. 그는 폴란드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츠의 <쿠오 바디스> 폴란드 원서를 한국어로 옮긴 국내 최초의 번역가다. 이전까지 폴란드어 책은 영어나 일본어 번역서를 한국어로 재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는 ‘시인들의 시인’으로 칭송받는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국내 최초로 번역·출간했고, 현재 가장 주목받는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를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한참 전에 알아보고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그뿐일까. 윤동주, 김소월, 서정주의 시집과 황진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 등 국내 작가의 작품을 폴란드어로 옮겨 폴란드 독자들에게 알린 것도 그가 처음으로 해낸 일이다. 최성은 번역가는 지금까지 32권의 폴란드어책을 한국어로 다시 썼고, 9권의 한국어책을 폴란드어로 옮겼다.

몇 년 새 우리 기업들이 폴란드에 속속 진출하면서 폴란드어 전공자들의 몸값이 훌쩍 뛰었지만, 국내에서 폴란드 문학을 꾸준히 번역하는 사람은 최성은 번역가를 비롯해 서너 명에 불과하다. 그가 2006년 모교 교수로 임용된 후에도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오롯이 유지하며 매년 2~3권씩 꾸준히 작업해온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하지만 방학 때마다 번역에 매달리느라 변변한 휴가 한 번 못 떠난 이유가, 여전히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라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저는 번역을 할 때마다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해요. 낯선 외국어에서 출발해 목적지인 모국어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여정에서 ‘내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뛰어난 작가와 작품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 문화, 공간을 탐험합니다. 폴란드어와 모국어 사이 ‘의미의 회색지대’에 갇혀 헤맬 때는 정말 괴롭지만, 출구를 찾아냈을 때의 기쁨도 그만큼 커요. 게다가 독자들을 제가 만난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는 보람과 재미를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이 멋진 여행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최성은 번역가는 얼마 전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 번역을 끝냈다. 폴란드어 원작이 애초 프랑스어 축약본으로 나왔고, 이를 미국 번역가가 영어로 옮긴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원작이 크게 왜곡된 것을 이번에 바로잡은 것이다. 그는 이처럼 ‘해외 주요 언어권’을 경유하지 않는 폴란드어와 한국어의 ‘직접 소통’이 의미 있다고 여긴다. “변방의 언어, 비주류 문학이 주류의 기준과 평가를 넘어서 직접 대면하고 소통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용인/글·사진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이런 책을 옮겼어요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l 문학과지성사(2016)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대표작 170편을 수록한 책. 1945년 등단작부터 60여 년간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정곡을 찌르는 명징한 언어, 풍부한 상징과 은유, 절제된 표현과 따뜻한 유머” 등 “쉼보르스카 문학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쿠오 바디스 I, II
헨리크 시엔키에비츠 지음 l 민음사(2005)

작품 출간 당시 폴란드는 국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작가는 점령국인 러시아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시공간적 배경을 고대 로마로 옮겨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1905년 폴란드에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폴란드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준 작품.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l 민음사(2019)

가장 최근(201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어딘가에서 떠나왔거나 어디론가 떠나기를 꿈꾸는 여행자, 이방인, 경계인들의 이야기로, 21세기 호모 노마드에게 바치는 찬가”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l 은행나무(2016)

토카르추크의 초기작으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에 국내에 출간돼 화제가 됐다. ‘태고’라는 가상의 폴란드 마을을 배경으로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이 신화적인 요소들과 어우러져 한 편의 장엄한 우화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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