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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다

등록 2021-10-15 04:59수정 2021-10-15 15:18

[한겨레book]

세계적 석학의 대학 강연에 바탕…정치철학자 20여명 사유세계 조망
가차 없는 평가에 역사적 맥락까지 정치철학사 속 칸트 중요성 강조

정치철학사
플라톤부터 존 롤스까지

오트프리트 회페 지음, 정대성·노경호 옮김 l 길 l 3만8000원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테네의 혼란한 정치 현실에 따른 정치적 죽음이기도 하였으니, 서양철학사는 출발부터 정치철학사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정치철학의 토대가 되었다. 정치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78)의 독일 튀빙겐대학 강의에 바탕을 둔 <정치철학사>의 본래 제목은 ‘정치적 사유의 역사’다. 성찰적, 체계적, 비판적,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유라면, 사유는 곧 철학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 칸트, 헤겔, 밀, 존 롤스 등 ‘위인’ 12명과 아부 나스르 알 파라비, 아퀴나스, 단테, 마르실리우스, 스피노자,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제임스 매디슨, 마르크스, 니체 등 ‘작은 인물’들을 다룬다. 이른바 세계적인 석학이 개론·입문 성격 강의를 하면 어떤 지적 풍경이 펼쳐지는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쉬운 책이 아니다. 철학사와 정치사상의 기본 밑천이 필요하다.

책의 구성에서 특징은 인물과 인물 사이 역사적 배경 해설이자 보충 부분인 ‘막간’이다. ‘막간’ 덕분에 이 책은 역사적 맥락이 이어지는 통사(通史)이자 사상사 성격까지 갖춘다. 각 장 끝 ‘더 읽을거리’도 요긴하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특히 서론과 제6장, 제13~14장, 제26장을 읽기를 권한다.” 읽을수록 다음 막간이 기대된 나머지 막간부터 찾아 읽었다. 로크와 루소 사이 막간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제시된, 계몽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네 가지 핵심 개념은 이렇다.

“인식, 행위, 정치 등에 보편적 척도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이성. 개인적·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행위의 원리로서의 자유. 모든 인간의 번영의 총체로서의 진보. 그리고 종교적 교조주의뿐만 아니라 도덕적·신분적 선입견 및 절대주의 국가와 교회의 후견적 지위에 대한 비판.”

정치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 독일 튀빙겐대 누리집 갈무리
정치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 독일 튀빙겐대 누리집 갈무리

회페는 각 인물을 가차 없이 평가하며 요약해낸다. 키케로는 “문제를 정립하는 역할로서는 인정받았지만 그 문제에 답을 내놓은 인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홉스의 “절대주의적 주권자라는 생각은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로크는 “저항권을 제외하면 혁명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론의 힘을 과대평가한다.” 니체가 “참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예찬하는 가운데 진정한 정치의 가치를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난해도 될 것이다.”

각 인물에 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핀 뒤, 회페 자신의 눈으로 평가를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해준다. 이 책이 강의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을 새삼 떠올리게 하며 회페가 친절한 강의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정리한다.

“마키아벨리는 무조건적인 반도덕주의를 주창한 것이 아니라 군주가 공동선을 위해 행동할 때는 도덕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행동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선의 추구야말로 고대 이래로 어떤 방식의 지배이든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였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비난은 적들을 깎아내리는 데 적절한 비난이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이 결코 마키아벨리주의자일 수는 없었다.”

비록 정치철학사의 관점에서는 ‘작은 인물’로 분류했지만 회페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스피노자는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와 관용에 대한 강력한 수호자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의 역사를 위한 중요한 초석을 놓았으며, 더 나아가 종교적 후견에서 국가를 해방하고 국가적 후견에서 개인을 해방하는 과정의 초석을 놓았다. <신학-정치학 논고>의 서설, 제16장, 제20장, 그리고 제4장과 제19장도 추천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치철학사에서 주요 사상가로 꼽히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바뤼흐 스피노자,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치철학사에서 주요 사상가로 꼽히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바뤼흐 스피노자,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책을 앨런 라이언의 대작 <정치사상사>(문학동네)와 겹쳐 살피면 주목할 점이 드러난다. 라이언의 책에는 칸트가 없다. ‘찾아보기’에도 ‘더 읽어볼 만한 책들’에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 회페는 칸트를 정치철학의 ‘위인’으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사의 큰 부분은 크든 작든 간에 칸트와의 대결로 집약할 수 있다. 규범적 정치철학의 회복은 많은 곳에서 칸트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법치국가의 이론도, 인권과 무엇보다도 국제법 질서와 평화질서의 이론도 언제나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이 철학자에 의존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회페가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치사상·이론의 전망에서 정치적 사유를 다루는 라이언과 철학의 눈으로 철학사의 자리에서 다루는 회페의 차이다. 그런 회페에게 근대 철학의 획기적 산맥인 칸트는 필수불가결이다. 이 차이가 라이언 <정치사상사>의 결함을 뜻하진 않는다. 회페는 사상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 정도가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회페의 <정치철학사>는 인물로는 존 롤스, 주제로는 ‘조망: 세계법질서’로 끝난다. 라이언의 <정치사상사> 역시 존 롤스 그리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미래’로 끝난다.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회페는 “차이의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인격체와 사회 형식의 다양성에 열려 있는 세계공화국이자 세계법질서”의 비전을 말한다. 지나치게 이상적이지 않냐고? 정치철학사는 공동체의 정치적 이상을 추구한 인물들의 기록이자, 현실에서는 좌절된 이상의 등기부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나누어 쓴 <서양 고대·중세 정치사상사>와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책세상),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사월의책), 그리고 김만권의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개마고원) 옆에 이 책의 자리를 마련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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