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l 문학동네 l 1만4800원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너와 나라는 점, 그 두 개의 점을 견고하게 잇는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 박상영의 <1차원의 세계>에 대해 쓰기 위한 첫 문장을 옮겨 놓다가, 우연히 거기에 겹쳐진 다른 문장을 함께 읽었다. 펼쳐진 페이지를 누르기 위해 올려 놓은 문진에 새겨진 문장이다. 얼마 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때 마일리지로 함께 구입했다.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천선란, <천 개의 파랑>)라고 쓰여 있다.
말장난 같지만 겹쳐진 ‘1차원’과 ‘일차원’은 각각 다른 차원에 있다. ‘일차원’을 말할 때 우리는 ‘삼차원’의 입체를,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수많은 관계와 감정과 이해들을 상정한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작가는 ‘1차원’을 말하며 다른 차원을 정의하고자 한다. 그럼 이 ‘1차원’은 무엇인가. 물론 사랑이다.
심리 상담사가 된 ‘나’가 중고등학교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안간힘을 쓰며 묻어 두었던 기억 사이에, 지금도 그를 종종 괴롭히곤 하는 불안과 공포의 증세가 드러난다.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천장의 네 귀퉁이가 자신을 압박하는 공포,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 내가 그 시절 사랑했던 ‘윤도’는 그 공간 밖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라고, 그래서 너와 나의 점을 잇는 선분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천장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근사한 말을 해 준다.
‘나’는 두 개의 세계를 산다. 나를 짓누르는 천장의 무게로 이루어진 세계, 그리고 너와 나를 잇는 선분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세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천장이 압박하는 세계가 내가 견뎌야 하는 현실이며 너로 이어지고 만들어진 세계는 그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너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갈 만큼 마음의 힘은 강렬하며, 그것으로 하나의 세계를 꾸릴 만큼 구체적이다. 물론 그 마음의 선분을 지킬 수 없게 하는 천장과 벽으로 이루어진 세계 역시 구체적인 위력이며,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해서 폭력적이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세계는 대체로 폭력적이지만 여기에서는 ‘나’와 ‘윤도’의 사랑이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점이 특히 문제가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 다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내’가 안전하게 자신을 감추면서 세계의 폭력을 적당히 회피했다면, ‘윤도’는 위악적으로 그 폭력에 가담했고, ‘태리’는 유약하게 폭력에 노출되었다. 남고의 동급생 사이에서 동성애가 취급되는 방식은, 그리고 그로 인해 당사자들이 감당해야 할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로 다가온다. ‘쓰레기’가 되고, ‘병신’이 되고, ‘모욕의 먹잇감’이 되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너와 나의 선분이 상처받지 않고 의연할 수 있을까. 나에게서 윤도로, 그리고 태리에게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선분은 은밀한 비밀이 되고, 그러다가 격렬한 원망이 되고, 때로 비겁한 외면이나 상처가 된다.
그 선분들이 힘들게 이어져 하나의 세계가 되었고, 그것이 이 소설이라고 말한다면 속 편한 소리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 이 진심의 선분들을 잇고 이어서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나와 윤도와 태리로 이어진 선분, 내가 윤도의 책상 위에 초콜릿을 갖다 놓는 것을 목격한 무늬와의 관계, 무늬가 사랑한 미혜, 그런 미혜와 사랑하며 오랫동안 동거인의 관계를 유지한 태란 누나. 자신이 사랑한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나’에 대한 질투로 오히려 나의 비밀과 비겁을 꿰뚫어 보는 희영. 그들을 읽다 보면 이들의 관계로 이어진 세계가 너무 일반적이어서 어떻게 이들을 ‘이반’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싶다.
그래서 이성애 중심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잃고 강퍅하게 유지되어 왔는가를 알게 된다. 배제와 차별은 물론이고 위해와 폭력으로 억압된, 그러나 견고하고 당당하게 존재하는 사랑의 세계가 있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 이들은 ‘소수자’가 아니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가려져 있던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던 세계의 맹목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쓰려 했으나 “세상의 아픈 부분들이 섞여 들어가버렸다”고 썼다. 200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의 공통 경험에는 아이엠에프(IMF)가 있다. 모두가 일제히 몰락하는 것을 목도하고, 더 이상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세대. 부모들은 파산하고 빚을 지고 밤도망을 가야 했고, 그런 부모를 견디며 자란 자식들은 성장을 믿지 않는다.
소설에서 30대가 된 내가 떠올린 기억 속에 아버지들의 죽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윤도의 아버지 장례에 참석하고 ‘나’는 윤도를 떠나보냈다. 아이엠에프 당시 실종된 태리의 아버지는 도시정비 사업으로 물을 뺀 못에서 백골로 발견되었다. 성장의 끝자락에서 유흥과 도박으로 몰락에 편승하거나 몰락을 견뎠던 아버지들이 죽고, 그 죽음 이후 나는 기억 속의 애인들과 비로소 헤어지거나 다시 만난다. 성장은 오래도록 유예되었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그 시절의 마음을 건져 올릴 뿐이다.
시련을 견디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비치는 햇살을 마주하는 성장소설은 이제 없다. 성장과 성공과 성숙 같은, 한 방향으로 그어진 일직선을 따르지 않고 그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각자의 선분을 긋는다. 그 선분들이 얽혀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렇게 낱낱이 이어진 세계가 3차원으로 빛난다.
서영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