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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인의 마을] 나는 너를 잊었다 - 이윤설

등록 2021-10-29 04:59수정 2021-10-29 09:50

나는 나를 잊었다, 고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나는 나를 너에게서 잊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둠의 시계는 나의 눈금을 지나며 조금씩 나를 잊어가고 너는 너를 점점 나에게서 자란다 나를 뚫고 나와 네 팔이 내 팔에 덧나온다 네 입술이 내 입술 위에 포개진다 네 귀가 내 귀에 싹이 된다 나보다 보들보들하고 여릿여릿하다 갓 따온 나물 같다 나는 너를 숨죽이며 죽은 체한다 네가 어서 나를 통과해버리길 너는 처음부터 내가 밴 나인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 나를 주고 나는 벗겨진 피복으로 툭 떨어져도 좋겠다 나는 나를 잊었다 어느 밥상 위에 구절이 맑은 숭늉빛 노래를 부를 때 너에게서 나는 나를 잊었다 침대 속에서 나는 웃고 웃고 있는데도 너에게 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나에게 없으므로 숨가쁘게 나는 너를 기다리는 나에게 하얗게 들 소풍을 나선다 흰 레이스치마 맨발에 앵두처럼 붉어진 입술이 터지도록 봄이 오는데 단비는 꿀물처럼 적시는데 나를 두 팔에 감싸안고 어디로 부는 바람인지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쓰라리도록 나는 나를 잊었다, 고 너에게 나는 나에게서 말한다

-이윤설 유고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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