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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주 천천히 거니는 것도 위대함이 있다

등록 2021-10-29 04:59수정 2021-11-01 15:54

[한겨레Book]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나무 꼭대기를 향한 여행
알렉산드르 온라두 지음, 시모나 뜨라이나 그림, 임은숙 옮김 l 파랑새어린이(2004)

<나무 꼭대기를 향한 여행>은 성찬이 덕분에 알게 된 그림책이다. “독서교실 후배들에게 추천하는 책”으로 기증하겠다며 책을 내밀었을 때 성찬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좋은 책을 자주 접하고 책 읽기를 격려받는 등 책과 관련된 즐거운 경험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어린이에게 책에 대한 취향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어린이가 직접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문제는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이 꼭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릇된 인식이나 부정확한 정보가 담긴 책을 그저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럴 때 나는 ‘그래, ○○이는 이 책을 좋아하는구나’ 정도로만 반응하고, 다른 책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성찬이로부터 이 책을 받아 드는 순간 나는 기쁜 한편으로, ‘독서교실에 비치하고 싶지 않은 책이면 어떡하지? 성찬이가 올 때만 책장에 꽂아 둘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성찬이는 확신에 찬 얼굴로 “선생님도 읽어보시면 좋을 거예요”라고 했다. 성찬이 말이 맞았다.

이 그림책에는 점층적인 재미가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로 나무 꼭대기를 향한다. 길목에는 코끼리 배처럼 커다란 나뭇잎, 거센 바람, 남들의 비웃음 등 방해요소가 많다.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고 ‘배워야 할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꼭대기에 기어이 도착한다. 그림책에는 올라가고, 더하고, 강해지고, 해내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관건인데 이 책은 주인공의 정체를 숨김으로써 서스펜스를 확보했다.

주인공이 호감 가는 인물인 점도 좋다. ‘기어오르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면서 자신감을 내보이던 주인공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토로해 웃음을 자아낸다. 새와 고슴도치가 참견하고 무당벌레가 약을 올려도 “어쩌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며 의연히 대처한다. 누구일까? 나는 애벌레일 것이라고 짐작했고 성찬이도 그랬다고 했다. 주인공이 만나는 인물 중 하나로 애벌레가 등장할 때까지는. 그러고 보니 앞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건방진 나비에게 “나한테 필요한 건, 여기 우리 집에 다 있다고”라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아주 천천히 거니는 것도 나름대로 위대함이 있는 것 같아요”라는 주인공의 깨달음은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가는 것이다. 좋은 그림책은 중요한 통찰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러면서 재미도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여전히 ‘어린이는 좋은 책을 알아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독자가 다른 독자에게 어떤 책을 권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안다.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이야기, 솔직하고 당당한 주인공, 선명한 주제.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에서 어린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독서 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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