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세계박람회 크리스털 팰리스 내부 묘사도(1851). 수정궁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국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고 개최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이즈음 ‘소비자’라고 불리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다.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길사 제공
대변혁 1·2·3
19세기의 역사풍경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l 한길사 l 각 권 4만원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역사학계는 매우 소란했다. 대학도시 괴팅겐에 소재한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 소장직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결국 역사학계의 불행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1956년부터 독일 역사학계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던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는 2007년 문을 닫았다. 반세기 동안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는 새로운 역사방법론의 실험장이었고 국제 역사학계와의 소통 거점이었다.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가 문을 닫자 세계 전역의 역사학자들은 상실감이 컸다.
2009년 위르겐 오스터함멜이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을 발간했을 때 독일 역사학자들은 저자에 대한 실망감을 상당 부분 지웠고 뒤늦게 저자를 이해했다. 오스터함멜은 2005년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의 후임 소장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가 곧 철회했다. 그것은 연구소가 문을 닫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기에 오스터함멜을 탓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스터함멜은 당시 망설이다 연구와 집필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이 책으로 오스터함멜의 당시 선택에 대한 실망이 다 만회되지는 않지만 이 책은 역사연구소의 어떤 집단 연구에도 맞먹는 위용을 갖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쌓였고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인식 요구도 거셌다. 21세기 들어 인간의 삶은 더욱 급격히 변하고 세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정보 공유와 소통의 차원에서는 ‘세계사회’가 자리를 잡았지만, 삶의 환경과 역사의 방향은 오히려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세계 여러 지역의 연루와 상호작용이 복잡하다고 세계사를 다시 선별적 역사인식에 기초한 문명성쇠의 철칙이나 사변적 역사철학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이 책은 21세기 세계 여러 지역의 얽히고설킨 혼재 상황과 문명 불안의 역사적 근거를 찾으며 21세기 세계의 전사인 19세기 역사를 ‘풍경’으로 펼친다.
아이작 크룩섕크가 그린 <노예무역의 금지>(1792). 1791년 영국의 노예무역선 리커버리호의 선장 존 킴버가 흑인 노예를 싣고 항해하는 장면이다. 당시 노예들은 마치 ‘화물’처럼 적재되었다. 유럽인들은 비좁고 비위생적인 노예 ‘선적’으로 인한 질병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노예들을 갑판에서 강제로 춤추게 했다. 이 그림은 두 명의 어린 여자가 춤추기를 거부하자 무자비한 채찍질로 이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선장은 재판에 넘겨졌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수많은 승선 노예 가운데 10~20%가 항해 도중 사망했고 훗날 ‘지옥의 항해’라 불리게 된다. 한길사 제공
<대변혁: 19세기의 역사풍경>은 21세기 세계화 관점의 역사 서술 중 가장 탁월한 성과다. 그것은 19세기 ‘세계의 사회사’다. 서론과 결론 및 제1부 근경은 저자가 ‘19세기’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저자는 19세기를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 1914년 1차대전으로 끝나는 ‘장기 19세기’(에릭 홉스봄)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19세기가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나는지에 대해 저자는 “아마도 해답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근대’나 ‘근대성’의 특정 이해 방식에 매달리는 단선적인 세계사 서술을 극복하며 어떤 종류의 폐쇄적인 사유도 거부한다. 저자는 구체제의 근대 세계로의 초기 이행을 다룰 때는 1770년에서 1830년 사이를 주목했고, 1830년대부터 1880년대 사이 시기를 19세기의 핵심 시기로 보았지만, 19세기의 종말을 1920년대까지 올리기도 했다. 그는 지구적 차원의 변화 흐름과 지역의 예외를 함께 다루면서 탄력적으로 시기를 구분했다.
난징조약을 맺는 장면. 난징조약은 1840~42년 벌어진 제1차 아편전쟁을 끝내기 위해 1842년 8월29일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상하이, 광저우 등 다섯 항구가 개방되었다. 또한 중국은 전쟁배상금으로 영국 정부에 1200만달러를, 영국 상인들에게는 아편 몰수로 인한 손해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한길사 제공
저자는 주제와 관점의 다원성을 전제하면서 제2부에서 19세기의 ‘전경’을 8가지로 다루었다. 이주와 생활수준, 도시와 공간 확장, 제국과 국가, 국제질서와 혁명 등이다. 낡은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는 유럽의 주요 정치 사건과 현상을 준거로 삼은 뒤 여타 지역을 각주 정도로 다루었다. 반면, 이 책은 19세기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 유사한 물질적 발전과 제도적 변화, 심성과 일상의 전환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저자는 마치 프랑스 사회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19세기 역사를 서술한 듯한 인상을 갖게 만든다.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역사서술이 1500년에서 1800년의 시기에는 적합하지만 급격한 변화의 시대인 19세기에 적용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답이다.
1900년과 1904년의 동아시아 시국을 나타낸 그림. 19세기 말에 중국을 침략한 서구 열강을 상징적인 형태로 묘사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곰은 북쪽에서 침입하고 있고, 영국을 대표하는 사자 몸통을 가진 불도그 머리는 중국 남부에서 꼬리로 산둥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개구리의 오른손에는 광저우만을 가리키는 하이난섬이 있고 왼손에는 쓰촨성 일부가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대머리독수리가 필리핀에서 접근하는 중이다. 독수리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1859년 미 해군 원수 조사이아 태트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일본은 대만을 향해 낚시를 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을 가로질러 광선을 퍼뜨리고 있다. 프로이센에 이어 다른 유럽 국가들도 지도 하단에서 중국을 침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한길사 제공
브로델이 지속에 관심을 가졌다면, 오스터함멜은 생성과 변화에 주목하며 19세기의 지구적 보편성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스터함멜은 19세기의 특징을 생산효율의 비대칭적 상승, 유동성의 증가, 문화권 사이의 인식과 교류 증대 및 비대칭성, 평등과 계서제 사이의 긴장, 해방의 중요성 증대 등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19세기에 대한 기왕의 적극적인 평가들, 즉 근대와 근대화, 자유주의나 혁명, 민족주의나 국민국가 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제국주의의 등장에 기초한 거대서사에 매혹되었던 독자들에게 그것은 좀 허전하다. 하지만 역사철학과 정치규범을 덜어낸 채 현대 인간 삶의 역동적 파노라마와 시간의 독특성을 맛보며 현재의 깊이를 재보려는 독자들에게는 그것은 어떤 역사서술이나 인문학 고전보다 더 자주 숨을 멈추고 눈을 들어 지평선을 찾는 경험을 갖게 할 것이다.
아돌프 멘첼(1815~1905)이 그린 <압연공장>(1875). 새로운 사회로 진입한 결정적인 전환점은 전일제 노동자가 출현한 때였다. 19세기의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노동의 이미지는 주도 부문인 중공업(철강업)이 기반이 되었다. 이 작품은 시대의 정수를 반영한 그림으로 보는 사람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한길사 제공
마지막으로 저자는 19세기의 새로운 역사 현상들이 유럽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문명 성과가 아니고 유사한 발전과 변화가 비유럽 지역에서도 일어났음을 환기한다. 이때 저자는 유럽과 비유럽의 연루와 전이, 상호작용 못지않게 비교에도 상당 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연루와 전이, 상호작용과 유비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기본 인식 전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유럽과 비유럽의 동시적 발전과 상호작용을 내세워 유럽의 독특성을 지우는 길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 책은 19세기가 ‘유럽의 세기’였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유럽중심주의로 전락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제국주의와 ‘문명화 사명’ 비판과 노예해방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저자가 애초 중국사와 식민주의 전문가임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저자는 독일의 평화사가 요스트 뒬퍼의 말, “유럽 내부로부터 유럽을 서술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에 의지해 2300쪽이 넘는 이 책을 완성했다. 그런데 한국에는 “한국(동아시아) 내부로부터 한국(동아시아)을 서술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이미 새로운 관점의 세계사 서술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세계’는 항상 세계를 새롭게 인지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