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시인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 경찰 간부로도 활동한 김분옥 선생 묘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3년 전에 이 묘비를 찾았다.
“태어나 죽기까지 거리는 다 다르지만 죽으면 다 같아요. 죽은 자의 삶을 서로 비교하지 말고 모두 존중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최근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지노)을 펴낸 정종배 시인에게 20년 이상 서울 망우리공원을 찾으며 삶에 대해 배운 게 있는지 묻자 한 답이다. 책에는 망우리 묘역에 묻힌 역사 인물 130여 명의 삶과 죽음이 담겼다.
지난해 8월 서울 신현고에서 정년을 맞은 그는 장안중 교사 시절인 2000년 4월 첫 토요일부터 지금껏 매주 망우리 묘역을 찾고 있다. 그때 시작한 학생들의 망우리 묘역 체험활동은 청담고, 청량고, 신현고 등 학교를 옮길 때마다 이어졌다. 2010년 청담고에 있을 때는 망우리 봉사·체험 활동 방과후학교에 지원자가 몰려 4개 반이나 편성했단다.
그는 1933년 일제가 조성한 이래 40년 동안 공동묘지였던 망우리 묘역에서 사라질 뻔한 근현대사 인물들 흔적도 여럿 찾아냈다. 그는 2002년 우연히 ‘일제 강점기 빈궁 문학의 최고봉’ 서해 최학송(1901~32) 묘지를 처음 확인하고 사재를 털어 세 차례나 봉분을 새로 만들었다. 2010년에는 아예 서해 묘지 관리인으로 등록해 지금껏 묘를 지키고 있다. 한국 기상학 발전의 토대를 놓은 국채표 2대 기상청장과 유관순 열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경찰 간부를 지낸 김분옥 선생 묘비도 그가 처음 확인했다.
현재 중랑구청 망우역사문화공원 자문위원도 맡고 있는 정 시인을 12일 망우리공원에서 만났다.
한때 5만기가 넘던 망우리의 분묘는 지금은 7천기 정도만 남았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망우리 역사 인물을 기리는 움직임으로 92년과 98년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의 묘지에 연보비가 들어섰고 2016년에는 망우리 인문학길 2개 코스가 조성됐다. 1977년부터 망우묘지공원으로 불리던 이름도 98년 망우리공원으로 바뀌었다.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은 어려서부터 지도 보기를 좋아하고 길눈도 유난히 밝았다는 저자가 20년 이상 발로 뛰어 묘의 주인을 찾고 후손을 수소문한 땀의 결과물이다. 독립운동가 안창호·한용운, 정치인 조봉암·장덕수·이기붕,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오기만·김사국, 문인 김영랑·박인환·최학송·방정환·함세덕, 영화인 나운규, 화가 이인성·이중섭, 조각가 권진규 등의 생사를 조감했다. 조봉암과 이중섭처럼 지금도 묘가 망우리에 있는 인물은 물론 안창호와 김영랑, 이기붕 등 한때 묻혔던 인물까지 모두 포괄해 정리했다.
삶 못지않게 죽음 뒤 이야기가 많은 게 이 인물전의 특징이다.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 선생과 정치 노선을 같이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최백근 선생의 묘비가 3분의 2가량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든가, 월북 연극인 함세덕 선생 비문의 ‘전사’ 중 ‘전’ 글자가 뭉개져 있다는 답사 내용 등이 대표적이다. 정 시인은 책에 3년 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 영랑 김윤식 자녀들이 현재 천주교 용인묘원에 잠들어 있는 부친을 대전현충원 대신 망우리로 이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썼다. 한국전쟁 중 사망한 영랑은 처음에는 장충사 뒤 군사도로 아래 묻혔다가 1954년 망우리로 옮겼고 그 36년 뒤 재이장했다. “영랑의 막내 따님과 연락해, 김광섭 시인 주도로 망우리 이장 때 세운 시비 발굴도 나섰지만 못 찾았어요. 구나 시에서 예산을 들여 시비도 찾고, 영랑 묘도 망우리로 옮겼으면 합니다.”
2000년 봄 서울 장안중 교사 시절부터
인근 망우리 묘역 체험활동 이끌어
1933년 일제 이래 40여년 공동묘지로
한때 5만기 넘던 묘지 7천여기 남아
사라질 뻔한 근현대사 인물들 ‘발굴’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130여명 조명
정 시인은 6년 전부터 1994년 망우리에서 대전현충원으로 묘를 옮긴 영화 <아리랑>의 감독 춘사 나운규 묘지 터와 묘비 찾기에도 힘써왔다. “나운규 맏손자에게 물으니, 영화인협회가 1967년 망우리에 세운 나운규 묘비를 이장 때 묻고 갔다더군요. 묘비를 꼭 찾아 다시 세우고 싶어요.”
이날 정 시인이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주산 신명균(1889~1940) 묘역이었다.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을 지낸 주산은 2017년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다. “주산 묘가 망우리에 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그동안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지난 4~5월 중랑구청 발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터 망우 분과(위원장 김영식 작가)에서 한 묘지 전수 조사에서 묘비를 찾았죠. 그때 주산을 비롯해 새로운 인물 30여명과 서민 비문 60~70개를 찾았어요.”
지난봄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 전수 조사 때 찾은 주산 신명균 묘비. 한국전쟁 때 날아온 총탄으로 묘 일부가 훼손됐다. 강성만 선임기자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와 1983년부터 37년을 교사로 재직한 정 시인은 망우리공원을 교육과 연계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하나의 계기로도 삶이 바뀔 수 있어요. 망우리에 묻힌 이름난 분들을 보면 청소년 시절에 아픔이 많았어요. 이중섭은 어려서 공부를 못해 평양에서 밀려 정주 오산학교까지 갔다가 거기서 유학파 미술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죠. 조봉암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급사를 했었죠. 일본 강점기에 조선 산림녹화에 힘쓴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선생도 망우리에 묻혔는데요. 체험활동 때 유독 이 분에게 관심을 보였던 한 제자는 지금 서울대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가 21년 전 망우리공원에 빠져든 데도 아사카와 다쿠미 영향이 컸단다. “묘역을 처음 찾은 날 화환이 즐비한 묘가 눈에 띄어 가 보니 아사카와 묘지였어요. 마침 제가 전날 밤에 아사카와라는 이름과 그의 책 <조선의 소반>이 나오는 박문하 선생 수필 ‘약손’을 읽었던 터라 흥미가 생겼죠. 그때부터 여기를 자주 찾았어요. 아사카와가 제 인생을 바꾼 셈이죠.”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에서 정 시인이 사진을 찍었다. “명당에 묘를 쓰면 묘가 커진다고 하더니 맞는 것 같습니다. 아사카와 다쿠미 묘도 그렇죠.”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망우리공원이 앞으로 어떻게 관리되길 바라냐는 질문에 ‘토건’보다 ‘원형 보전’이 중요하다고 했다. “묘역을 넓히기 보다는 묘 주변 나무 등 원형을 보전하면 좋겠어요. 이중섭과 방정환 선생 묘역이 커지면서 주변 나무들이나 조화가 든 유리상자 등 소품들이 다 사라졌어요. 이중섭 묘 주변에는 노간주나무와 전나무, 개암나무 등 수종이 다른 나무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향나무 12그루만 있어요.” 그는 이어 “망우리공원에 묻힌 역사 인물들 자료를 축적하고 체계적으로 학술 연구도 하면 좋겠는데 관에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계획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김영랑과 김동명 시인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사가 석영 안석주 묘를 다시 망우리로 모시고 싶어요. 이중섭이 절친이었던 구상 시인 네 가족을 그린 그림 부조를 이중섭 묘역에도 세우려고요. 제 대학 은사인 구상 시인은 이중섭 묘역에 소나무를 심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